[누가복음 10:29-37] 피 묻은 손의 경건 – 1991년 2월 17일, 김상근 목사

8월 21, 2026

피 묻은 손의 경건

누가복음 10장 29~37절 / 1991년 2월 17일 / 낙산교회

김상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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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문]


지난 주일에 나는 소위 원론적 신앙과 대비되는 각론적 신앙에 살자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 다시 여러분 앞에 원론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세 사람을 먼저 소개한다. 하나는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묻는 한 율법 교사다. 성서는 그를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예수에게 물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누가는 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동기를 예수를 “시험”하고자 했다든지, 혹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편집자의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싶다. 도대체 누가를 비롯한 예수 집단 사람들은 율법학자니 서기관이니 제사장이니 하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개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율법학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비교적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싶다. 예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셨는데 그는 즉각적으로 대답을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서의 각각 다른 책, 즉 신명기 6장 5절과 예레미야 19장 18절에 있는 것인데, 이 율법학자는 그것들을 잘 종합하고 정리하여 자기 지식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평소 그가 영생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증거가 된다.

예수는 “네 대답이 옳다.”고 맞장구를 치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당신의 말씀을 마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는 말씀을 첨가하신다. 사실 첨가하신다기보다 예수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이 말씀이 핵심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대로 율법학자에게도 원론적 신앙은 있다. 그는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고 또 가르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다시 묻는다. 이것은 그가 아직도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원론은 숙지하고 있지만 이웃을 사랑해 본 경험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에게는 각론적 신앙이 없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이웃이 누군가는 모른다. 원론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사랑한 이웃이 없다.

예수께서는 한 예화를 들어 ‘이웃’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길가에서 강도를 만나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죽게 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다. 여기 세 사람이 지나가는데 처음 두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할 두 번째와 세 번째 원론적 신앙인들이다.

그들은 누군가? 예수에게 이웃이 누구냐고 묻고 있는 율법학자를 포함하여 유대 사회에서는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누구보다 율법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가르침의 핵심을 꿰뚫어 파악하고 있으며 동시에 사랑하는 데 혹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거기서 머뭇거리다가는 자기도 강도떼를 만나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황급히 지나갔을 것이라거나, 아마도 이미 죽어 시체가 되었다고 판단되어 시체를 만짐으로써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였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피하여 지나감으로 오히려 그는 경건을 지킨 것이다. 그를 돕지 않았으나 경건한 제사장이다. 종교 제사직 관리인인 레위인에게도 경건이 필요했다. 몸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아무 일이나 덥석덥석 할 수는 없다. 소위 지식인, 사회적 지위가 상당한 사람들이 갖는 경건의 허위성이 폭로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앞의 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을 등장시킨다. 말하자면 각론적 신앙인을 내보이시는 것이다. 다음 같은 말로 이야기를 전환시키신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길을 지나다가 그 사람에게 와서 그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제사장,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을 대비시키고 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증오하고 업신여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을 대비시킨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똑같이 그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을 본다. 그러나 “피하여 지나”가지 않는다.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된다고 대조를 이루어 놓는다. 측은한 마음은 자기 것을 내어 치료하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옮기며 숙박비를 지불케 했다.

사마리아인은 누군가? 율법학자와는 다르다. 그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이웃을 본 사람이다. 이웃이 되는 사람이다. 또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도 다르다. 그는 허위적인 경건 따위를 의식하지 않는다. 저가 필요하기 때문에 덥석 자기 것을 내놓고 그 손에 피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 율법학자와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들 모두 원론은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 지식에 혼이 살아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점이다. 혼 없는 지식의 소유자는 사랑해야 하는 구체적 현실에 직면하면 피하여 버리고 만다. 부딪혀도 그 속의 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이웃이 누군가 하는 건조한 질문을 반복할 따름이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원론을 알고 원론에 이의는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웃을 찾지 못한다. 이웃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딱히 그를 이웃이라 하게 되지 않는다. 이런 저런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론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 셋을 소개했는데 낙산교회는 누군가? 네 번째로 소개될 교회인가? 그래서는 안된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보전’(JPIC)에 대하여도 알 만큼 안다. 오늘날 교회가 한반도와 세계의 정의와 평화 문제에 일정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교회에서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일제히 자고 말 것이다.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해서 교회가 계몽하고 제 몫을 감당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다시 말한다면 슬금슬금 다방으로 가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네 대답이 옳다.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모든 것을 다 아는데 우리는 어느 누구의 이웃도 아니라는 점이다. 누가 우리를 자기의 이웃이라 하는가? 현장이 없다. 교회는 모름지기 이러저러 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할 뿐 삶이 없다. 도대체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현장도 없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무엇인가? “현장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는 것이다. 율법학자처럼 정답을 말할 수는 있으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전문 지식을 갖고 있으나, 그러나 사마리아인처럼 그 손에 현장의 피가 묻어 있지 않다. 덤벼들어 현장을 살아 내지 않는다. 맨송맨송한 율법학자 같다. 경건한 제사장, 레위인 같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첫째는 우리의 신앙이나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신앙을 적절히 쓰기도 하고 유보하기도 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편의주의적인 질문이다. 나 중심의 질문이다. 내가 이웃을 골라잡을 수 있다. 내가 할 수도 있고 아니 할 수도 있다. 내게 지금 현장이 없다, 이웃이 없다 하면 고만이다. 그것은 내 할 일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렇게 하면 평생 이웃을 아니 만나고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나를 중심하여 일을 찾고 혹 현장에 서기도 하며 이웃이라 하기도 하고 아니라 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를 이웃이라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장이 없는 신앙인이다. 피가 묻는 일이면 적당한 구실을 붙여 피하여 지나간다. 평생 그 손에 저의 피가 묻는 법이 없다. 깨끗한 손, 그 손은 율법학자의 손이요 제사장, 레위인의 손이다.

둘째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라는 사고의 전환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는 ‘네 이웃이 누구냐 고 묻지 않고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나^ 고 물으신다. 내 마음에 맞거나 안 맞거나 내 체면 수준에 적절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한 것이 문제될 수 없다. 그것이 나에게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다. 내게 불편을 일으키느냐 여부도 문제될 수 없다. 저쪽이 필요로 하는 그 필요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의 위기는 어디에 있는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는 말씀을 외면해 버리는 데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어느 누구도 그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다. 피 묻은 손의 경건이 없다. 이것이 위기다.

예컨대 1995년을 한반도의 희년으로 우리는 선포했지만 그에 따르는 행동은 없다. 그것이 구호가 아닌 모든 사람에게 희년이 되게 하기 위해서 희년을 희구하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 창조세계의 보전을 말하지만 그것을 위해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다. 피 흘리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우리가 남길 유산을 위해서 지금 우리는 구체적으로 상처에 감람유와 포도주를 붓고 싸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론에 맴돌지만 그것으로 만족한다.

편의주의적이고 자의적인 신앙 태도를 버리자. 행동 동기가 나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 저쪽에 있어야 한다. ‘저가 나를,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라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어내자. 우리의 신앙이 구체성을 갖게 하자. 오늘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 원론을 다시 반복하기만 할 것인가?

각론-현장을 만나고 그에 응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다짐하고 결단하는 자리가 여기 이곳이 되게 하자. 그래서 타성과 형식의 포로가 된 교회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교회 공동체를 여기에 이루어내 보자. 누군가가 우리를 이웃이라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피 묻은 손, 그 손에서 살아난 경건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저 사람의 이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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