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택하여라
신명기 30장 15-20절 / 1988년 1월 17일 / 여신도주일
[회상 노트]
1987년!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봉우리를 오를 수 있었다. 오래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기어코 대통령 직선제를 끌어냈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군부에 어부지리를 안겨 주고 말았다. 민주 진영의 분열이 원인이었다. 분하고 허탈했다. 원망스럽기도 했다. 우리의 부족한 역량을 통감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온갖 기회를 열어 주신 하나님께 죄스러웠다.
좌절의 자리는 깊었다. 그 깊이를, 자신을 찾고자 하는 진실의 몸부림으로 겨우 메워 갔다. 비틀거리면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희망은 무엇이고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구현해 낼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세상의 현실에서,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진리란 도무지 무용한 것인가? 무언가?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기장 여신도회주일 설교다. 나도, 우리 모두도 소유, 권력, 출세 … 이런 것들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반생명적 현실은 바로 그 결과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오늘은 기장의 모든 교회들이 여신도주일로 지키는 날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특히 여신도들의 책무가 무엇인가를 스스루 가늠해 보고 또 여신도회에 대한 이해를 갖고 지원하고 협조하는 성도의 교제를 드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전국 교회는 한 본문을 갖고 한 제목의 말씀을 증언하게 된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벗어나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랑하다가 급기야 약속된 가나안 땅 바로 입구에 도달하게 된다. 그동안 그들이 겪은 우여곡절이 어떠하였겠으며 기쁨과 고뇌가 어떠했겠는가? 이집트를 떠날 때의 장년들은 모두가 세상을 떠나 버렸다. 혈기 방장했던 모세도 아마 70 안팎의 노인이 되어 흰머리와 수염을 날리게 되었을 것이다. 노인 모세가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자기 백성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한다. 오늘 본문은 그 설교 중의 한 대목이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 30:15, 19).
이렇게 모세는 호소한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이집트에서 살던 사람들이며 광야를 거치고 여러 나라를 지나오면서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 이집트의 거대한 문화, 지나 온 각 나라가 풍요하게 풍성하게 사는 것, 이런 것들을 보았고 그것이 부러웠다. 저들은 야훼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잘 살고, 그런데도 강력하고, 그런데도 부강하지 않은가? 우리는 야훼를 신앙한다 하지만 종살이나 하고 강력한 군대를 만나면 패잔하여 도망치기나 하지 않았던가? 저들은 정착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야훼를 믿는 우리는 떠돌이다. 우리의 생활과 비교한다면 우리 주제꼴이 오히려 초라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나는 ‘이방 문화 가치관’이라 이름 붙인다.
그러기에 가나안에 들어간다면 우리도 어떻게 해서든지 부자로 살고, 어떻게 해서든지 강력한군대를 만들고, 어떻게 해서든지 풍요하고 풍성하게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나만은 꼭 그렇게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이런 이방 문화 가치관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는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그렇다. 부자가 되자, 잘 먹어 보자, 더 가져보자, 이런 것이 우리의 목표다. 하루 세끼 먹으면 족한 것이다. 철마다 입을 옷이 있고 안식할 집이 있으면 족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더 먹고 더 소비하고 더 차지하고 더 소유하려 한다.
사실 우리나라만 본다면 철 따라 과일이 나게 되어 있다. 봄이 되면 딸기가 나고 조금 지나면 토마토, 참외, 수박 그리고 사과, 배, 감, 이런 순서로 백과가 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겨울에 딸기며 참외며 수박을 먹고자 한다. 또 적절하게 먹으면 될 것인데 포식을 하고자 한다. 그래서 억지로 결실을 갖게 하자니 인체에 해로운 비료를 쏟아 붓게 되고 그래서 병을 가져온다. 그러나 돈을 벌면 그만이다.
대기 업들이 요새 앞을 다투어 양담배 수입을 서둔다. 그저 돈이 생긴다면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도 아닌 대재벌 기업이 가축 도살, 엿 만들기 등 중소상인들이 겨우 손댈 수 있는 것까지 몽땅 쓸어가려 한다. 이것이 곧 이방 문화 가치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또 경유해 온 여러 강대국들로부터 배운 가치관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세계의 구조를 보아도 그렇다. 우리가 분단당한 것도 미국의 북방 정책을 막아서서 혹은 소련의 남방 정책을 막아서서 각각 제 나라의 이익을 보장받고자 한 것 때문이다. 강대국 때문에 우리는 600만을 죽이는 6ㆍ25를 치러야 했고 사상범이라는 죄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남과 북에서 사형하고 옥에 가두어 왔는지 모른다. 그러자니 우리 사회는 깨어지고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더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덜 가지는 사람을 생기게 한다. 여기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가 심대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더 소유하고 더 먹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산구조에 무리를 가하고 자연조차 인위에 의하여 그 순환의 리듬이 깨어지게 된다.
미국을 보자. 얼마나 잘 사나. 그런데도 세계를 자기 시장으로 삼으려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한다.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주었다. 밀가루도 주고 버터도 공짜로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가 농사 지도를 합네 하고 다니더니 밀 농사를 없애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밀이 나지 않게 되었다. 이때쯤 우리는 온통 빵을 먹게 되었고 버터를 먹게 된다. 그리고 그 밀은 거의 전부 미국에서 사오고 있다. 우리의 식탁을 완전하게 점령한 것이다. 사실 우리를 도운 것이라기보다 배고픈 우리에게 밀가루를 주어 식성을 바꾸어 놓는 장기 투자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모두가 면 제품을 입고 있었고 소풍을 가면 온통 목화밭이었다. 물론 면이 건사하기도 어렵고 잘 헤지기도 했지만 나일론이라는 것이 나왔고 그것을 입어야 멋이 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나일론을 입었다. 목화밭은 없애 버렸고 이제는 눈 씻고 보려야 볼 수 없게 되었다. 산업 구조도 바뀌었다. 요새는 또 나일론은 몸에 좋지 않고 면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면을 입었다. 그런데 면사는 100% 수입한다. 어디서 수입하나? 미국에서다. 스스로 제 목화밭은 없애고 남의 것을 사다가 입는다. 해마다 목화 아가씨가 온다. 면 옷 선전이다. 면이라면 우리가 더 잘 아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우리는 미국의 고객이다. 돈이 많아 고객이 아니라 고객이 아니 될 수 없게 되어 고객이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정책이다. 먹을 것, 입을 것 있으면 될 것인데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먹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생산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의 모든 것을 미국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미국의 정책이다. 세계를 좌지우지하자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미국의 정책이다. 소련도 그럴 것이고 북한도 그렇다. 마유미 사건이 발표대로라면 무엇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하나? 그 집안을 좌절로 몰아넣어야 하나?
육군 소장이면 됐지, 꼭 정권을 잡아야 하나? 그러자니 총을 쏘고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는 온갖 억지를 쓴다. 정화라는 이름으로 애매한 사람들을 하루 아침에 직장에서 내쫓는다. 그리고 제 부하들을 여기저기 심는다. 그 가족의 절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순화 교육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숱한 사람을 잡아다가 살아 나갈 수 없을 만큼 욕을 보인다. 내 하는 일에 저항하는 놈은 가만 두지 않겠다는 엄포다. 그것에 저항하니 막자고 잡아넣고 고문하다가 꽃다운 젊은이를 죽이기도 한다. 그래 놓고는 참회한 양 앞으로 고문을 근절하고 경찰을 이러 이렇게 쇄신하겠다고 당당하게 약속한다. 퇴임 후에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고 나선다. 그런데 그가 사실은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축소, 조작의 장본인이라는 것 아닌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가치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더 갖는 것, 더 강한 것, 더 먹는 것, 이런 것이 위대한 것이요 선이요 성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한 것, 착한 것, 더불어 살아가는 것 따위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아니, 이런 것은 그야말로 나라와 나라 간의 문제인가? 높은 사람들만의 문제인가? 우리는 그렇지 않은가?
혜준이 사건은 무엇인가? 그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 존엄을 볼 수 없다. 인간 양심을 찾을 길이 없다. 어린아이를 영하의 날씨에 바깥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 둔 채 자기는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죽은 아이를 산에 던져 두고 결혼식을 올렸다. 아이를 죽여서라도 돈을 갖고 결혼식 하고 이러면 되는 것인가?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나?
여기서 우리의 가치가 몰락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 갖는 것, 더 먹는 것, 이런 것이 위대한 것이요, 이런 것이 선이요, 이런 것이 성공이구나 하는 가치관이 생기게 된 것이다. 선하고 착하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것 따위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요, 가나안까지 오는 동안 보고 감탄하고 부러워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강한 것, 높은 것, 풍요한 것, 더 갖는 것, 더 먹는 것, 이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다. 이것이 사실은 저주요 불행이요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방 문화 가치에 매혹이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은 죽음이라고 했고 불행이라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했고 저주라고 했다. 선한 것, 착한 것, 의로운 것, 더불어 사는 것, 이런 것을 생명이요 행복이요, 축복이라 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 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해 가고 있는가? 죽음, 불행, 저주, 불순종을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모세는 말한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어떻게 복되게 살 것이냐?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는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복되게 살고 번성할 것이라고 모세는 가르친다. 만약 더 갖고자만 한다면, 더 강한 것만을, 더 높은 것만을, 더 먹으려고만 한다면, 모세의 설교는 이렇게 이어진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일러둔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가 이제 요르단강을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 30:18-19).
우리는 지금 수천 년 전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모세의 설교를 다시 들어야 한다. 세계의 강대국도, 높은 사람들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다시 이 설교를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방 문화 가치관에 한 눈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더 갖는 것보다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한 길을 걸으려는 신선함이 있어야 한다. 더 높아지려는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려는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이 아닌 생명을, 저주가 아닌 축복을 택하게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어머니들이 이 신앙에 먼저 서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 자녀 교육에서, 교회에서 생명을 택하여 가는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죽음과 저주의 수렁에서 나와 우리 모두를 건져 내야 한다. 부서지고 깨진 양심과 선심,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된 선과 의, 경쟁으로 파괴된 더불어 사는 인간 사회를 기어코 회복해 내야 한다. 이방 문화 가치들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생명 문화를 여기에 일구어 내야 한다. 이것이 이 세대에 생명을 택하게 하는 생명의 봉사다.
우리는 수천 년 전, 모세가 자기 백성에게 당부한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택하라는 말을 지금 우리에게 한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의 어머니들에게 큰 사명이 있다. 책임이 있다. 우리가 먼저 죽음의 길에서 나와야 하는 것, 우리의 사명이요 우리의 책임이다.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에게 생명의 길을 안내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생명을 택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