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성 목사가 담임하는 성남외국인노동자교회에 갔다. 그날이 아마도 창립예배 날이었던 듯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더불어 사는 것이었다. 이웃은 물론이고, 짐승들과도, 심지어 미물들과도 함께 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외국인 노동자들과도 함께 살려 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죄된 본성이 근본적 문제다. 그러나 그 탓만 하는 것은 신앙인이 할 일이 아니다.
그날 거기 예배에 참예한 여러 교인들과 목사들을 염두에 두고 한 설교였던 것 같다.
지금도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 중 여러 사람들이 한때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옛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무탄트』라는 체험 소설이 있다. 어떤 미국의 여의사가 한 호주 원주민의 초청을 받고 그들과 함께 긴 순례를 하게 된다. 그 순례에서 깨달은 것을 소설로 써 낸 책이다. 호주 원주민 중의 한 종족인 그들을 여의사는 “참 사람”이라고 부른다. “참 사람”들은 그 행진을 끝으로 지구에서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이유는 지구가 더 이상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지구를 그들이 왜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라 했던가? 본래 지구 위의 모든 것은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제 욕심만 채우려 하고, 그 결과는 더불어 살던 세계를 몽땅 부수어 버렸다. 더 이상 더불어 살 수 없는 지구에서 그들은 스스로 집단적으로 죽어 없어졌던 것이다. “참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인간을 가리켜 ‘무탄트’라고 부른다. 그들 언어로 ‘돌연변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사람인데 정상이 아닌, 갑자기 유전자에 이상이 생긴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무탄트’라고 한 것이다.
지구에 함께 있는 모든 것은 한 몸과 같은 존재들이 었다. 각각 떨어져있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큰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유기체다. 이것이 ‘참 사람’들의 철학이요 신앙이었다.
‘무탄트’들은 지구 위에 아무 쓸데없고 해만 끼치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파리도 그런 것일 것이다. 더럽고 징그럽다.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물이 귀한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헤매었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목욕은 어떻게 했을까? 태어나서 10년, 20년 목욕한 번 못하고 살 수 있었을까?
‘참사람’들과 여의사가 함께 행진하는 도중에 저쪽으로부터 파리 떼가 새까맣게 쏟아져 몰려오는 것이다. 여의사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허둥지둥한다. 그런데 ‘참 사람’들은 환성을 지른다. 무척 좋아한다. 파리떼가 덤벼들기 시작한다. 여의사는 손을 휘젓고 몸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파리 떼와 싸운다. 그의 공격에 맞아 죽는 파리들도 많다. ‘참 사람’들이 여의사를 만류한다. 그러지 말고 옷을 벗고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한다. 여의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참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몸에 조금 걸쳤던 쪼가리조차 벗어 던진다. 그리고 몸에 힘을 풀고 가만히 서 있는다. 파리 떼가 새까맣게 몸을 뒤덮었다. 얼마 후 파리들은 일제히 어디론가 날아간다.
이런 일이 다시 닥쳐왔다. 여의사는 온갖 역겨움을 참고 옷을 벗고 몸을 내맡겨 보았다. 파리들이 몸에 앉기 시작한다. 눈을 슬며시 뜨고 제 몸뚱이를 보았다. 마치 까만 갑옷을 입은 것 같았다. 파리들은 열심히 제자리에서 움직이며 무언가를 한다. 그러더니 일제히 날아간다. 이게 웬 일인가? 자기 몸이 깨끗해진 것이다. 머리도 감겨 주고 귀 속, 코 속 모두 깨끗하게 씻어 준 것이다. 참으로 오랜 만에 때밀이의 도움을 받은 사우나 목욕을 한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파리 같은 것을 왜 만드셨을까? 쓸데없는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쓸데없는 짓을 하셨다. ‘참 사람’들은 파리와도 유기체였다. 더불어 살고 있었다.
오늘 새벽 이 원고를 쓰고 있는데 내 책상머리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우리 집에는 파리가 없다. 그런데 웬 일로 내 앞에 파리가 있다. 이것을 잡을까, 그냥 놓아둘까, 죽일까, 더불어 살까? 어떻게 했겠는가? 옆에 있는 신문지를 말아서 잽싸게 때렸다. 파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다. 나는 그래서 ‘무탄트’ 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명령하신다.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훗날 유대인들에게 큰 짐이 되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일’이란 그러면 무엇인가? 일이란 무거운 것을 든다거나 그런 것이다. 무거운 것이란 얼마의 무게일까? 단추를 한 개 달 만한 실을 바늘에 꿴 무게 이상의 무게를 가진 것을 들면 안식일 성수를 안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규제가 생기게 되었다. 안식일 성수가 좋고 기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일 성수 명령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너도 일하지 말아야 하지만 너의 아들딸도, 남종도 여종도 일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나아가 네 집의 소나 나귀나 어떤 집짐승에게도 일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너희는 쉬고 다른 사람이나 짐승들에게는 일을 시킨다면 이미 거기에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깨어진 것이다. 강조점은 ‘너, 쉬어라’는 데 있지 않다. 신분의 차이가 생기고 그래서 차별이 있게 되었지만, 누구는 주인이 되고 누구는 남종, 여종이 되었지만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요 믿음이다. 심지어 짐승까지와도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요 믿음이다.
‘그렇지 않은 세상을 너희가 경험했지 않느냐? 더불어 함께 살지 않는 세상을 너희가 경험했지 않느냐?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를 생각해 보아라. 거기에 기쁨이 있었더냐, 감사가 있었더냐, 사는 즐거움이 있었더냐?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끌어 냈다. 그랬으니 너희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이상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남종도, 여종도, 식객도, 소나 나귀도 모두 쉬게 하라는 명령을 주시고는 이렇게 마감하신다.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하나님의 이상은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세상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라. 여기, 이 땅에 불평등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출애굽시키실 것이다. 그래서 기어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실 것이다.
1987년!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봉우리를 오를 수 있었다. 오래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기어코 대통령 직선제를 끌어냈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군부에 어부지리를 안겨 주고 말았다. 민주 진영의 분열이 원인이었다. 분하고 허탈했다. 원망스럽기도 했다. 우리의 부족한 역량을 통감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온갖 기회를 열어 주신 하나님께 죄스러웠다.
좌절의 자리는 깊었다. 그 깊이를, 자신을 찾고자 하는 진실의 몸부림으로 겨우 메워 갔다. 비틀거리면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희망은 무엇이고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구현해 낼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세상의 현실에서,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진리란 도무지 무용한 것인가? 무언가?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기장 여신도회주일 설교다. 나도, 우리 모두도 소유, 권력, 출세 … 이런 것들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반생명적 현실은 바로 그 결과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오늘은 기장의 모든 교회들이 여신도주일로 지키는 날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특히 여신도들의 책무가 무엇인가를 스스루 가늠해 보고 또 여신도회에 대한 이해를 갖고 지원하고 협조하는 성도의 교제를 드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전국 교회는 한 본문을 갖고 한 제목의 말씀을 증언하게 된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벗어나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랑하다가 급기야 약속된 가나안 땅 바로 입구에 도달하게 된다. 그동안 그들이 겪은 우여곡절이 어떠하였겠으며 기쁨과 고뇌가 어떠했겠는가? 이집트를 떠날 때의 장년들은 모두가 세상을 떠나 버렸다. 혈기 방장했던 모세도 아마 70 안팎의 노인이 되어 흰머리와 수염을 날리게 되었을 것이다. 노인 모세가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자기 백성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한다. 오늘 본문은 그 설교 중의 한 대목이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 30:15, 19).
이렇게 모세는 호소한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이집트에서 살던 사람들이며 광야를 거치고 여러 나라를 지나오면서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 이집트의 거대한 문화, 지나 온 각 나라가 풍요하게 풍성하게 사는 것, 이런 것들을 보았고 그것이 부러웠다. 저들은 야훼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잘 살고, 그런데도 강력하고, 그런데도 부강하지 않은가? 우리는 야훼를 신앙한다 하지만 종살이나 하고 강력한 군대를 만나면 패잔하여 도망치기나 하지 않았던가? 저들은 정착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야훼를 믿는 우리는 떠돌이다. 우리의 생활과 비교한다면 우리 주제꼴이 오히려 초라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나는 ‘이방 문화 가치관’이라 이름 붙인다.
그러기에 가나안에 들어간다면 우리도 어떻게 해서든지 부자로 살고, 어떻게 해서든지 강력한군대를 만들고, 어떻게 해서든지 풍요하고 풍성하게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나만은 꼭 그렇게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이런 이방 문화 가치관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는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그렇다. 부자가 되자, 잘 먹어 보자, 더 가져보자, 이런 것이 우리의 목표다. 하루 세끼 먹으면 족한 것이다. 철마다 입을 옷이 있고 안식할 집이 있으면 족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더 먹고 더 소비하고 더 차지하고 더 소유하려 한다.
사실 우리나라만 본다면 철 따라 과일이 나게 되어 있다. 봄이 되면 딸기가 나고 조금 지나면 토마토, 참외, 수박 그리고 사과, 배, 감, 이런 순서로 백과가 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겨울에 딸기며 참외며 수박을 먹고자 한다. 또 적절하게 먹으면 될 것인데 포식을 하고자 한다. 그래서 억지로 결실을 갖게 하자니 인체에 해로운 비료를 쏟아 붓게 되고 그래서 병을 가져온다. 그러나 돈을 벌면 그만이다.
대기 업들이 요새 앞을 다투어 양담배 수입을 서둔다. 그저 돈이 생긴다면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도 아닌 대재벌 기업이 가축 도살, 엿 만들기 등 중소상인들이 겨우 손댈 수 있는 것까지 몽땅 쓸어가려 한다. 이것이 곧 이방 문화 가치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또 경유해 온 여러 강대국들로부터 배운 가치관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세계의 구조를 보아도 그렇다. 우리가 분단당한 것도 미국의 북방 정책을 막아서서 혹은 소련의 남방 정책을 막아서서 각각 제 나라의 이익을 보장받고자 한 것 때문이다. 강대국 때문에 우리는 600만을 죽이는 6ㆍ25를 치러야 했고 사상범이라는 죄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남과 북에서 사형하고 옥에 가두어 왔는지 모른다. 그러자니 우리 사회는 깨어지고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더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덜 가지는 사람을 생기게 한다. 여기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가 심대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더 소유하고 더 먹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산구조에 무리를 가하고 자연조차 인위에 의하여 그 순환의 리듬이 깨어지게 된다.
미국을 보자. 얼마나 잘 사나. 그런데도 세계를 자기 시장으로 삼으려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한다.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주었다. 밀가루도 주고 버터도 공짜로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가 농사 지도를 합네 하고 다니더니 밀 농사를 없애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밀이 나지 않게 되었다. 이때쯤 우리는 온통 빵을 먹게 되었고 버터를 먹게 된다. 그리고 그 밀은 거의 전부 미국에서 사오고 있다. 우리의 식탁을 완전하게 점령한 것이다. 사실 우리를 도운 것이라기보다 배고픈 우리에게 밀가루를 주어 식성을 바꾸어 놓는 장기 투자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모두가 면 제품을 입고 있었고 소풍을 가면 온통 목화밭이었다. 물론 면이 건사하기도 어렵고 잘 헤지기도 했지만 나일론이라는 것이 나왔고 그것을 입어야 멋이 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나일론을 입었다. 목화밭은 없애 버렸고 이제는 눈 씻고 보려야 볼 수 없게 되었다. 산업 구조도 바뀌었다. 요새는 또 나일론은 몸에 좋지 않고 면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면을 입었다. 그런데 면사는 100% 수입한다. 어디서 수입하나? 미국에서다. 스스로 제 목화밭은 없애고 남의 것을 사다가 입는다. 해마다 목화 아가씨가 온다. 면 옷 선전이다. 면이라면 우리가 더 잘 아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우리는 미국의 고객이다. 돈이 많아 고객이 아니라 고객이 아니 될 수 없게 되어 고객이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정책이다. 먹을 것, 입을 것 있으면 될 것인데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먹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생산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의 모든 것을 미국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미국의 정책이다. 세계를 좌지우지하자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미국의 정책이다. 소련도 그럴 것이고 북한도 그렇다. 마유미 사건이 발표대로라면 무엇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야 하나? 그 집안을 좌절로 몰아넣어야 하나?
육군 소장이면 됐지, 꼭 정권을 잡아야 하나? 그러자니 총을 쏘고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는 온갖 억지를 쓴다. 정화라는 이름으로 애매한 사람들을 하루 아침에 직장에서 내쫓는다. 그리고 제 부하들을 여기저기 심는다. 그 가족의 절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순화 교육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숱한 사람을 잡아다가 살아 나갈 수 없을 만큼 욕을 보인다. 내 하는 일에 저항하는 놈은 가만 두지 않겠다는 엄포다. 그것에 저항하니 막자고 잡아넣고 고문하다가 꽃다운 젊은이를 죽이기도 한다. 그래 놓고는 참회한 양 앞으로 고문을 근절하고 경찰을 이러 이렇게 쇄신하겠다고 당당하게 약속한다. 퇴임 후에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고 나선다. 그런데 그가 사실은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축소, 조작의 장본인이라는 것 아닌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가치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더 갖는 것, 더 강한 것, 더 먹는 것, 이런 것이 위대한 것이요 선이요 성공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한 것, 착한 것, 더불어 살아가는 것 따위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아니, 이런 것은 그야말로 나라와 나라 간의 문제인가? 높은 사람들만의 문제인가? 우리는 그렇지 않은가?
혜준이 사건은 무엇인가? 그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 존엄을 볼 수 없다. 인간 양심을 찾을 길이 없다. 어린아이를 영하의 날씨에 바깥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 둔 채 자기는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죽은 아이를 산에 던져 두고 결혼식을 올렸다. 아이를 죽여서라도 돈을 갖고 결혼식 하고 이러면 되는 것인가?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나?
여기서 우리의 가치가 몰락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 갖는 것, 더 먹는 것, 이런 것이 위대한 것이요, 이런 것이 선이요, 이런 것이 성공이구나 하는 가치관이 생기게 된 것이다. 선하고 착하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것 따위의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요, 가나안까지 오는 동안 보고 감탄하고 부러워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강한 것, 높은 것, 풍요한 것, 더 갖는 것, 더 먹는 것, 이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다. 이것이 사실은 저주요 불행이요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방 문화 가치에 매혹이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은 죽음이라고 했고 불행이라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했고 저주라고 했다. 선한 것, 착한 것, 의로운 것, 더불어 사는 것, 이런 것을 생명이요 행복이요, 축복이라 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 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해 가고 있는가? 죽음, 불행, 저주, 불순종을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모세는 말한다.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어떻게 복되게 살 것이냐?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는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복되게 살고 번성할 것이라고 모세는 가르친다. 만약 더 갖고자만 한다면, 더 강한 것만을, 더 높은 것만을, 더 먹으려고만 한다면, 모세의 설교는 이렇게 이어진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일러둔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가 이제 요르단강을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 30:18-19).
우리는 지금 수천 년 전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모세의 설교를 다시 들어야 한다. 세계의 강대국도, 높은 사람들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다시 이 설교를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방 문화 가치관에 한 눈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더 갖는 것보다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한 길을 걸으려는 신선함이 있어야 한다. 더 높아지려는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려는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이 아닌 생명을, 저주가 아닌 축복을 택하게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어머니들이 이 신앙에 먼저 서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 자녀 교육에서, 교회에서 생명을 택하여 가는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죽음과 저주의 수렁에서 나와 우리 모두를 건져 내야 한다. 부서지고 깨진 양심과 선심,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된 선과 의, 경쟁으로 파괴된 더불어 사는 인간 사회를 기어코 회복해 내야 한다. 이방 문화 가치들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생명 문화를 여기에 일구어 내야 한다. 이것이 이 세대에 생명을 택하게 하는 생명의 봉사다.
우리는 수천 년 전, 모세가 자기 백성에게 당부한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택하라는 말을 지금 우리에게 한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의 어머니들에게 큰 사명이 있다. 책임이 있다. 우리가 먼저 죽음의 길에서 나와야 하는 것, 우리의 사명이요 우리의 책임이다.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에게 생명의 길을 안내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생명을 택하자!
매년 11월 셋째 주일에 드리는 추수감사절 축제가 시작되면 미국인들은 3,500만 명이 귀성 인파가 고향을 향하여 행진을 하고,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칠면조 파티를 합니다. 한국도 미국의 추수감사절처럼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축제분위기를 일으키고, 고향을 찾고 잔치를 하는 명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추석’입니다. 교회생활에 충실한 사람들도 추석과 주일이 겹치면, 교회를 떠나 고향으로 갈 정도로 추석은 온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명절입니다. 축제와 감사가 살아 있고,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사절예배는 미국인의 추수감사절이 아니라, 한국인이 ‘추석감사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70-80년대부터 추석이 한국교회의 감사절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고,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추석 명절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한국교회의 감사절은 ‘추수감사절’보다 ‘추석감사절’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1492년 10월 12일 카리브 해의 바하마 제도에 속한 섬에 도착한 이래 콜럼버스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호적으로 대해 온 인디언들에게 오히려 칼을 겨누고 그들 고유의 문화를 파괴한 것은 유럽인들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멕시코 지역의 아스텍 문명과 남미의 잉카 문명을 파괴하였습니다. 1620년 필그림스 믿음의 조상들이 플리머스에 도착하여 감사절을 지낸 후 350년째인 1970년 추수감사절에 인디언들이 모여와 이 날을 ‘통곡의 날’(Day of Mourning)로 선포하며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감사절 때마다 인디언들의 항의 시위는 해가 갈수록 그 수도 늘어가고 열기도 높아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 감사절의 유적지를 찾는 많은 순례자나 관광객들은 실망하고 언짢아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디언의 ‘통곡의 날’ 항의 시위는 뜻있는 미국 그리스도인 후예나 미국인들에게 필그림스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도착과 그들의 시작한 감사절을 추수감사절의 시작으로 보는 일을 반성케 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백인들이 미대륙에 도착하기 전 멕시코 이북의 북미 인디언 인구를 1천만 내지 1천 2백만으로 추산하며, 250여 년 뒤인 1890년에 그 인구는 23만 정도라고 했습니다. 미대륙 백인 조상과 인디언의 투쟁, 아니 백인들의 인디언 말살 정책이 얼마나 잔혹했던가를 상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본다면, 우리는 프리머스 필그림스 청교도들의 감사절 연원으로부터 추수감사절을 해방시켜야 함이 옳습니다. 청교도들의 감사절 유래보다는 벌써 수 천 년 전, 신ㆍ구약 성서에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던 역사에 기원하여, 하나님의 온갖 크신 은혜에 복귀하는 감사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필그림스의 청교도들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고 땅과 하늘, 해와 물, 온갖 곡물과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때, 적대의 감정이나 그동안 저질러진 백인의 인디언에 대한 죄책의 참회의 뜻도 포함회기에, 이런 감사절만의 ‘통곡의 날’을 치유하는 새로운 감사절로 변하게 하리라 믿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히브리(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가서 살다가 후에 애굽의 정권이 교체되자 애굽 사람들로부터 탄압과 억압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서 애굽에서 동족을 탈출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도록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목축업과 함께 농사를 배워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은 첫 추수를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를 드리는 내용이 신명기 본문에 나옵니다. 각종 햇곡식을 광주리에 담아 예배를 집례하는 제사장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제사장은 이를 받아 하나님의 제단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뢰는 신앙고백을 했는데, 신명기 26장 5-9절을 학자들은 이를 ‘옛 신앙고백’이라고 부릅니다. 이 신앙고백을 한 다음에, 온갖 햇곡식을 먹고 즐길 때 레위인과 거류하는 객과 함께 먹고 즐기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옮겨다니고 이사하는 떠돌아다니고 해매고 다닌 방랑자, 나그네의 삶을 이어왔습니다. 사막과 광야를 해매고 유리방황해 온 아픔의 역사를 체험한 민족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약 4천 년에 걸쳐서 12개의 강대국 민족의 침략을 받아 고생한 방랑의 나그네 생활을 해왔습니다.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비잔틴 제국, 아랍권, 십자군, 또다시 아랍인, 터키, 영국 등의 민족들에 의하여 점령, 포로, 강제 이주, 피난 이주, 학살, 약탈 등을 당해왔다고 보면, 떠돌이들의 흩어지고 피난 가고 정착했다가 또 잡혀 가고, 헤어지고, 죽고 하는 수난의 악순환의 역사를 걸어 온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오늘의 유대인들도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에 의한 아우슈비츠에서 6백만 명의 대학살(Holocaust)이라는 나그네들의 민족 수난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의 역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삼기 위하여 특별히 훈련시킨 민족 역사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사를 보면 그러한 유리방황의 유량생활을 해 오면서도 이른바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 신앙을 계속 이어 온 신앙의 역사를 배울 수 있습니다. 평화롭고 안정된 때에만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항상 위험과 불안과 혼미한 상황 속에서 의로운 싸움으로 신앙의 지조를 지켜 온 예언자들의 신앙전승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구원해 주신다는 확신을 유지하고 선승하면서 떠돌이같은 나그네들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전통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기에 감사라는 것은 고생과 수난의 삶 속에서 진행되고 이어져 간 것입니다.
수천 년 역사에 걸쳐서, 우리 한국 민족은 외국으로부터 976회나 침략을 받은 나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1998년 9월 5일자 〈타임〉지에 “남한” 특집). 돌이켜 보면,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고난의 역사! 한국 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의 가락은 고난이 주제입니다. 이 땅도, 이 땅의 사람도,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치와 종교, 예술과 사상도 다 고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위치한 지정학적으로 보아도 이미 결정된 한국 역사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을지,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와 민족 역사의 변천에서 고난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 진리와 고난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한반도 세 면에서 보면 세 세력에 두루 싸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쪽의 중국과 북쪽의 만주와 러시아와 동쪽의 일본입니다. 이 위치는 마치 능동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라면 동북아를 뒤흔드는 중심이요 다스리는 서울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억세지 못한 자가 그 자리에 선다면 그때는 수난과 압박의 위치가 될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불행히도 후자의 것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고대, 중세는 생략하더라도 현대사에서 겪어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제의 침략과 강제징집, 동원을 비롯하여 8ㆍ15 이후의 남북분단과 6ㆍ25전쟁으로 인한 행방불명과 피난, 가족 이산 등을 따져 볼 때, 오늘 우리 모두도 살아남은 나그네들의 후예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추수의 계절, 11월을 맞아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나와서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나그네들이었지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여 출애굽의 해방과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한 감사의 신앙고백을 했던 것 같이, 우리 한국인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복음이 들어왔고 믿음으로 민족의 해방과 구원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된 우리의 처지에서도 감사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을 회고해 볼 때도 집을 옮기고 직업을 바꾸고 또 어떤 이는 이민을 가서 살면서 여러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오늘이 있게 해 주신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적이며 육적으로 방황하면서 나그네 같은 삶이었지만 그런 중에도 하나님 신앙과 삶의 변화를 체험했다면 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하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1970, 80년대 인권회복과 민주주의 실현(민주화 회복기)와 90년대 이후 민족의 일치와 화해(평화통일 실현, 남북개선)에 40여 년을 보내면서, 약속의 땅을 향한 40여 년의 히브리(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과 연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모세오경이나 성문서, 예언서들은 물론이고 신약성서에도 하나님을 향한 그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은 넘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도 범사에 하나님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도록 일깨우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감사는 신앙의 척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또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깊이 뉘우치며 감사해야 할 일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오늘과 같이 온 세계가 살기 어려운 세월을 살면서, 세계에 가장 부강한 나라에 살고 있는 자들로서는 한국도 포함하여 그 어떠한 형편에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몸에 걸칠 것, 지붕을 덮은 곳에서의 잠잘 곳이 있다면 우리는 세계에서 75% 이상의 부유한 자입니다. 은행에 돈이 있고 지갑에 현금이 있으며 집의 어디에든 잔돈이 있다면 지구의 부유한 자들의 상위 8%에 해당합니다. 아침에 건강하게 일어나고 병이 없다면 이 한 주간에도 살아남지 못하는 백만 인보다 운이 좋은 자입니다. 전쟁의 위험이나 감옥의 외로움, 고문의 고통 또는 굶주림의 처절함을 오늘 경험하고 있지 않다면 이 세계 5억 인들보다 행복한 자입니다. 만약 위협 구금 고문이나 죽음의 위험 없이 자유스럽게 예배드리거나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자라면 축복된 자입니다. 지구상의 수십억 인구에게 아직도 이런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축복을 계산하고 명단을 작성하자면 아직도 한이 없겠습니다. 가족과 친구들, 의식주와 자동차, 건강과 일터, 자유와 기회, 작은 아파트라도 상ㆍ하수도와 냉ㆍ온방에 침대 욕실 샤워대까지 가진 상태입니다.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을 다 가지고 있으나, 우리는 아직도 고마움보다는 불만과 짜증이 더 많은 것은 어찌된 연고입니까?
그러나 우리의 감사가 잘 살고 성공하고 만사형통해서 감사하는 것이라면 이는 온전한 감사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없는 경우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언제나 듣고 읽어도 아름답고 공감이 가는 감사정신을 일깨우는 하박국의 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에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둘 것 없고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어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합 3:17-18).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의 고전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에 한 교활한 친구가 왕자와 작별하며 비밀을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나의 비밀, 아주 간단한 비밀 하나가 있습니다. 사람이 바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슴으로만 가능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왕자는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what is essentila is invisible to the eye)는 말을 반복하며 마음에 간직합니다. 이는 바울이 이미 터득한 진리와 같은 맥을 갖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아무리 가져도 충분하지 않아 끝없이 더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문화, 영원한 불만족의 딱지가 붙은 문화에서, 창조주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급진적인 감사’를 그 특징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불만족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돈의 문화에 속한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죄가 우리 속에 그 형체를 드러내고, 우리의 습관을 좌우하며,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감사를 깊이 체험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창조에 대하여, 우리가 받은 생명의 선물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구속과 평화에 대하여만이 감사할 줄 모르는 문화와 그 영향력을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보석이나 돈, 가죽 옷이나 값비싼 물건들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으며, 오직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들 즉 믿음, 사랑, 지혜의 영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같은 것이 귀함을 알고 그런 것들을 위해 살며 그런 유산을 우리에게 전해 주려 애썼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귀함을 알고 깨닫게 될 때 그 위력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부귀영화 같은 이 모든 것을 분토 같이 여기며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고 가르친 그 영원한 것을 향해 진력할 뿐이라 고백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왜 소수집단인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공인 종교가 되었는가에 대해 연구한 바 있습니다. 토인비에 다르면 그 이유는 인명 존중이요, 형제 사랑이요, 이웃에 대한 관심이라 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은 물론이고 이방사람들도 형제로 대하고 그들을 따뜻하게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삶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다시 형제가 되고 이웃이 되는 길은 사랑의 친교, 코이노니아의 회복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한반도 상황, 동서냉전의 마지막 결전지로 여기는 한반도에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정의와 형제애, 평화의 새날을 이루어 낼 것이라는 남북 간의 공존과 동포애, 관심으로 소통되고 평화의 감사제가 일어나는 꿈을 꾸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제10차 WCC 총회의 주제인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찬송하며 감사의 축제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어거스틴의 저서에 보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성도의 사귐을 하다가 헤어질 때는 언제든지 우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것이 한 인사처럼 되었다고 전해줍니다. 어떤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나서 억울한 이야기 핍박당하는 이야기 순교당하는 이야기 등을 하다가도 마지막 헤어질 때에는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 신앙인들은 감사를 생활화하였습니다.
사실 감사절은 어느 한 날 한순간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process)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인들이 광야를 여행하고 가나안을 향해 움직이던 나그네의 길과도 같이 끊임없습니다. 추수감사절은 하루만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과 표현이 범사에 나타나야 합니다. 동시에 어떤 은헤를 받으면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감사는 다른 감사를 낳고, 작은 감사는 큰 감사를 가져오며, 그런 감사의 자세는 온 나라 모든 백성에게 돌아옵니다. 진정한 감사는 그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소유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사(Thanks for Nothing)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신앙순례자로서 견디기 힘든 역사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갖고 눈을 들어 새로운 비전(vision)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들의 대열과 한국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지켜 주신 하나님께 뜻있고 정성된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본연의 상(image) 을 찾기 위해 더욱 힘있게 결속하고 하나 되어 새 출발을 다짐하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절기에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히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기독교 역사상의 대표적인 예수님의 초상화 곧 신자들의 신앙에 비친 종교적 거울에 비치는 예수상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비잔틴 시대의 예수상인데, 색 유리창에 조각으로 배색된 예수상입니다. 고대의 문제는 죽음 너머의 피안의 차원, 영원의 싱징을 묘사한 것입니다. 둘째는 중세 서방기독교의 예수상인데, 찬란한 황금법복을 입고 보석으로 수놓은 면류관을 쓰고 왕권의 지팡이를 쥔 심판주입니다. 현세와 내세를 다 주관히는 예수상입니다. 셋째는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는 예수상인데, 근세 경건주의 신앙에 비친 예수상입니다. 또한 양떼를 이끄는 목자 예수상인데, 역시 근세 부르주아지 신앙인의 눈에 비친 예수상입니다. 넷째는 발을 씻기는 남을 섬기는 예수상입니다. ‘남을 위한 사람’(man for others)이고, 더 나아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인간애로 대하는 예수상인데,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rist)라고 부릅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모범적 교본이 있습니다. 당시 미국연합장로교회가 10년 간 최고의 지혜와 신학적 연구 끝에 ‘1967년 신앙고백’을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발표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현대 교회 신앙고백의 대표적인 것인데 예수의 역사적 실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팔레스틴의 한 유대인인 예수는 그의 동족 가운데 사셨고 그들의 곤궁과 시험과 기쁨을 같이 당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과 행위로 나타내셨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에게 형제가 되셨다. 그의 완전한 순종은 오히려 그의 동족들과의 충돌을 일으켰다. 그의 생애와 교훈은 그들의 도덕적 선함과 종교적 신앙과 민족적 염원을 심판했다. 많은 사람은 그를 배척하고 그의 사형을 요구했다. 그들을 위해서 자기 자선을 스스로 내어 주심으로써 그는 모든 사람이 받고 있는 심판을 자기 자신에게 지우셨다.” 이 역사적 인물 예수님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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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긴 인생 여정은 마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경주와 같습니다. 히브리서 10장 후반부와 12장 1-2절에서 그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 여정입니다. 히브리서는 한 신앙인의 긴 인생의 여정을 승리로 산 지혜와 인내를 줍니다. 산등선이나 들판에 떨어진 물이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 여러 곡절의 사람들이 많은 시련을 당하면서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을 지키며 살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히 10:32)고 합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히 10:33), 심지어 우리의 산업을 빼앗기기도 하였으나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큰 상을 얻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 담대함을 포기하지 아니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확실하기에 하나님의 계획에 함께 머물며 그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침울에 빠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히 10:39)이기에 오래 참고 견디면서 신앙생활을 승리케 해야합니다. “인내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얻지 못하고”(히 10:36) 실패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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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히브리서 본문(히 12:1-2)에는 신앙인의 여정을 한 경기자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중요한 단어 몇 개가 나옵니다. 하나는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목표를 말합니다. 목적은 추상적이고 목표는 구체적입니다. 그 목적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림 한 장을 그려도, 하루에 길을 가도, 그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신앙정신입니다. 유럽 여행을 하는 중에 많은 조각품들과 그림들을 보게 됩니다. 그 작품들 하나하나가 일생 동안 만들고 그린 것입니다. 그 예술가들이 돈을 바라보고 했을까요? 명예를 위해서였을까요? 분명한 것은 모든 쓸 만한 명작들은 전부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그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한 시대를 높은 목적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첫째로 우리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얻(empower)습니다. 그의 힘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의 능력이 그로부터 우리에게로 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중에 그리스도로부터 생명력이 내게로 흘러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목적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목적이 된다는 것은 목적이 내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삶에 보람을 주는 그런 목적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하는 중에도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럴 때에 예수로부터 큰 생명력과 능력을 얻어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천사의 마음을 가지고, 천사의 얼굴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중에 그리스도로부터 엄청난 위대한 생명력이 내게로 오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 l2:l)라고 하는데, 이 말씀이 참으로 인상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증인이 있다는 말은 지금 내가 경기장을 달리고 있는데 구경꾼이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텔레비전으로 축구경기를 비롯한 모든 경기를 지구촌 수억명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생각만 해도 감동적입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정말로 신령한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조상들, 우리보다 먼저 가신 믿음의 조상들,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들 중에 먼저 가신 분이 지금 지켜보고 있는 중에 내가 여기서 삶의 현장에서 뛰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히 12:1)라는 말씀입니다. 경기장에서 중요한 것은 가벼운 몸입니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뭐든지 가벼워야 합니다. 옷도 가볍고 신발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깨끗해야 합니다. 또한 생각도 복잡하면 안됩니다.
대리석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하루는 사람들이 그의 조각품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대리석 돌덩이를 세워놓고 여기저기서 필요없는 부분을 다 떼어 냈더니 이런 좋은 작품이 됐습니다.” 떼어 내야 될 것을 다 떼어 내야 나타날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버려야 됩니다. 깨끗이 버려야 비로소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경기자는 가벼운 마음, 가벼운 몸으로, 가벼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목표를 향해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본문이 주는 넷째 말씀입니다. “인내로써 경주하며”(히 12:1), “예수는 십자가를 참으사”(히 12:2), 저자는 예수의 십자가를 인내로 보았습니다. 모든 경기에 있어서 마지막엔 인내로 승부가 납니다. 얼마나 참느냐, 어디까지 참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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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는 40대 초반에 수감되어 70대에 접어드는 10,000일을 감옥에서 생활하다가 27년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세상과 단절하여 폐인이 되기에 충분한 여건이었으나 그리스도인이던 그는 끝내 절망하지 않고 백인 정권의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의 죄악은 정의의 하나님과 세계양심세력에 의해 무너질 것을 희망하며 확신했습니다. 그의 95세 서거에 즈음하여 타임지(Dec 19, 2013)는 항거자(Protester), 죄수(Prisoner),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라는 특집으로 그의 파란만장한 “자유를 향한 긴 여정”(Long Walk to Freedom)의 생애를 세계인들에게 가슴 뭉클하게 이야기합니다.
만델라, 그의 삶은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안정된 길 대신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 철폐 투쟁에 뛰어들었습니다. 27년간 무기징역으로 복역하며, 자기 정진을 통해 내적인 힘과 외적인 권위를 키워 민중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1994년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선거에서 첫 흑인 대통령이 되었고, 백인사회에 보복이 아니라 진실에 기초한 대화합을 실현했습니다. ‘진실과화해위원회’를 만들어 가해자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고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용서했습니다. 이 과정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만델라는 세계 모든 사람에게 더 큰 어떤 숭고한 의미, 즉 좌절과 패배의 참된 의미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일생을 통해 몸소 깨달은 인간 존엄성과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보복과 이웃에 대한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련의 인내가 한 개인이나 세계에 가져다주는 보화를 만델라는 실증하여 보여 주었기에, 우리는 그가 터득한 인고의 결실로서 고난의 세계를 평회롭게하는 예지를 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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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지 〈타임〉지(Dec 23, 2013)는 ‘인민의 교황’이라는 표현과 함께 ‘올해의 인물’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정했습니다. 교황의 권고문이 세계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사람을 죽이는 폭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성장의 열매를 소수가 독차지하고, 많은 민중들이 힘겨워하는 현실을 교회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교황의 거침없는 행보에 미국 극우파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와 똑같은 주장’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포용력이 넓습니다. 이를테면 가톨릭교회에선 이혼한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허용치 않습니다. 교황은 “성찬은 완벽한 이들에게 내리는 상이 아니라, 약한자들에게 주는 강력한 치료제이자 자양분”이라고 지적합니다. 낙태와 관련해선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했거나, 가난 때문에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겪었을 극심한 고통에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되묻습니다. 동성애와 관련해선 “그들이 선한 뜻으로 신을 따른다면, 내가 어떻게 그들을 정죄할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모든 교황의 행보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로서 미국 가톨릭 신자의 92%가 그에게 호감을 표시했습니다.
교황은 전 세계 분쟁과 사회문제에 대해 직접 언급을 통해, 특히 분쟁지역인 시리아, 남수단.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이라크 등을 언급하며 이에 대한 인류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교황의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과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난해 말에 한국사회는 대자보 열풍에 자발적 참여자들의 기발한 상상력들이 잇따른 바 있습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와 철도노조 파업 동의 여러 정치적ㆍ사회적 문제들을 겪은 바 있습니다. 2014년에는 정의와 화해 정직과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와 용기의 결단을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하셨고, 교황도 교회는 최선을 다해 정직한 사회실현을 위해 정치와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로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회복과 평등한 사회 실현을 위해 아픈, 성난 외침을 겸허히 경청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화해의 아름다운 나라를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찾아 위로하며 함께하는 모습이, 13세기 아시시의 성 프란치코의 영감과 예수를 닮았던 그 성인의 모습을 21세기인 오늘에 어두운 지구촌에서 실현해 보여 주는 듯한 감회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13세기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과 순명, 사랑과 겸허의 평화실현을 위한 성육신적 경건의 삶이 되살아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는 진정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과 그에 관한 신학을 다시 정립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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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70년부터 이스라엘은‘국토’, ‘주권’, ‘민족’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세계에 영원한 목적지 없이 순례자의 길을 떠났다가 20세기에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을 하게 된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으니, 2천 년 썩은 고목에 꽃이 핀 것 같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 저들에게 그 명맥을 이어 오게 했을까요? 우리는 그 답안을 신앙이라고 하겠지만, 어떤 신앙일까요?
구약은 곧 이스라엘 민족사와 그들의 신앙이 하나로 엮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사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 고백의 가장 오래된 것이 신명기 26장 5-9절입니다. 요약하자면,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소수로 거류하다가 큰 민족이 되었고, 애굽인의 학대와 억압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구해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내셨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민족의 원로들이 그들 자손에게 대대로 일러주어 암송하게 할 만큼 오래된 민족사적 고백으로서 아마 초기 단계에는 개별적으로, 사적으로 하다가 마침내는 민족적 축제, 특히 감사절에서 낭독, 교독 등으로 전승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들이 선 뿌리, 그들을 이끈 역사적이요 원초적 의지를 재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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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으로서 또는 신앙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긴 여정을 끝까지 아름답게 서는 덕목이 인내요, 그 인내는 희망이 받들어 주고, 그 희망은 신앙이 밑받침해 준다는 교훈이나 성서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분단 60년을 넘긴 민족적 비극에 대해 또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는 전쟁 당사국인 독일인이나 일본인이 아니라 그 피해와 억압의 장본인들입니다. 해방을 받았으면서 어찌하여 60년이 넘는 오늘에까지 남북분단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 한국사회는 역사 왜곡과 사실 오류로 비판을 받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문제 논란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현대사에도 올바른 이해를 하면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해방부터 현재까지 겪고 있는 민족분단을 회상하면 당시 승전국 미국이 한반도에 분단선을 그은 것은 미국 외교 역사의 관점에서도 냉전을 가져오게 한 참으로 비정한 역사였음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은 1945년 종전 후 20년(1965년) 만에 일본과 화해했고 수교를 시작했습니다. 6ㆍ25전쟁을 막후 조정했던 소련과는 1953년 휴전 후 38년(1991년) 만에 화해하며 수교했습니다. 6ㆍ25 전쟁 때 서로 맞서 싸웠던 중국과도 화해하고 긴밀한 교역국이 되었습니다. 한ㆍ중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동족인 북한과는 아직도 주된 적이며, 괴뢰로 보고 증오하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새해에는 부디 남과 북이 상생의 원리에 따라 화해와 진정한 교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그동안에 화해의 역할을 못 한 것에 대하여 깊은 참회를 해야 합니 다.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복음의 참 뜻을 되새겨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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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옹은 세계의 오물을 뒤집어 쓴 창녀 같은 한반도요, 세상의 온갖 죄악을 다 집결시킨 고난의 여왕 같은 존재라며, 이는 세계를 구원할 능력을 키우려 하시는 신의 섭리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혹하여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의 한반도의 고난과 아픔을 인류를 구원하려는 예수의 대속의 십자가로 믿고 싶어 하나 그만한 의식과 자질이 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인류구원의 역사가 이와 무관하다면 이보다 더 비참할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극심한 민족의 고난 속에서 이사야 53장의 수난의 종, 메시아의 태동을 꿈꾸었듯이. 우리 한민족도 냉전체제에 마지막 남은 한반도의 분단의 쓰라림도 세계를 구원하는 대속의 수난으로 믿고 해석하며. 인류의 새 희망을 여기에서 태동할 수 있게 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그 교세가 세계적이요. 그 규모나 활동이 세계 제일임을 자랑하지만, 회고하여 보면 지금까지 잘못 믿어 온 것에 대하여 참회하며, 새롭게 태어날 절호의 기회를 하나님이 오늘의 분단 한반도에서 주시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이 쓰라린 분단 상황을 자기들의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해 온 것을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이 쓰라린 분단 한반도의 고난 속에서 인류 구원의 대속의 진리를 반드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예지와 과제가 여기에 있고. 세계는 이런 수난과 시련 속에서 구원의 새 빛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 한국교회가 세계에 새 희망을 줄 적 격의 백성이라고 믿어서는 아니 되는 이유라도 있을까요?
2014년. 새해를 맞으면서 성서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깊고 넓은 코이노니아를 해야 합니다. 만델라, 프란치스코 교황 등이 고난의 역경 속의 역사에서 희망을 닦았듯이, 민족적 시련과 고난의 분단 속에서 그 의미를 판독하고. 먼저는 한 민족의 구원과 희망을 찾고, 고난의 온누리에까지 구원과 화해의 활력과 새 희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금후 한국교회의 선교 과제는 평화통일이고,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 역시 평화통일임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한반도분단의 문제와 시련은 남북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이해관계에까지 얽혀 있기에 더욱더 한민족의 예지와 결단, 희생과 용기를 요구합니다. 비유하면, 남북의 한민족은 머리는 둘이지만 몸은 하나인 쌍둥이 같은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가 병들거나 죽으면 또 하나도 병들고, 하나가 살면 둘이 다사는 운명의 존재이기에 인내로 피차 함께 아파하고, 돕고, 염려하고, 돌보면서 둘이 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평화통일에의 길로 인도해 주실 날을 믿고 소망하며, 인내하며, 믿음의 주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새롭게 출발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