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상은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신명기 5장 6절, 12-15절 /성남외국인노동자교회
[회상 노트]
김해성 목사가 담임하는 성남외국인노동자교회에 갔다. 그날이 아마도 창립예배 날이었던 듯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더불어 사는 것이었다. 이웃은 물론이고, 짐승들과도, 심지어 미물들과도 함께 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외국인 노동자들과도 함께 살려 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죄된 본성이 근본적 문제다. 그러나 그 탓만 하는 것은 신앙인이 할 일이 아니다.
그날 거기 예배에 참예한 여러 교인들과 목사들을 염두에 두고 한 설교였던 것 같다.
지금도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 중 여러 사람들이 한때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옛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무탄트』라는 체험 소설이 있다. 어떤 미국의 여의사가 한 호주 원주민의 초청을 받고 그들과 함께 긴 순례를 하게 된다. 그 순례에서 깨달은 것을 소설로 써 낸 책이다. 호주 원주민 중의 한 종족인 그들을 여의사는 “참 사람”이라고 부른다. “참 사람”들은 그 행진을 끝으로 지구에서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이유는 지구가 더 이상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지구를 그들이 왜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라 했던가? 본래 지구 위의 모든 것은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제 욕심만 채우려 하고, 그 결과는 더불어 살던 세계를 몽땅 부수어 버렸다. 더 이상 더불어 살 수 없는 지구에서 그들은 스스로 집단적으로 죽어 없어졌던 것이다. “참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인간을 가리켜 ‘무탄트’라고 부른다. 그들 언어로 ‘돌연변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사람인데 정상이 아닌, 갑자기 유전자에 이상이 생긴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무탄트’라고 한 것이다.
지구에 함께 있는 모든 것은 한 몸과 같은 존재들이 었다. 각각 떨어져있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큰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유기체다. 이것이 ‘참 사람’들의 철학이요 신앙이었다.
‘무탄트’들은 지구 위에 아무 쓸데없고 해만 끼치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파리도 그런 것일 것이다. 더럽고 징그럽다.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물이 귀한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헤매었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목욕은 어떻게 했을까? 태어나서 10년, 20년 목욕한 번 못하고 살 수 있었을까?
‘참사람’들과 여의사가 함께 행진하는 도중에 저쪽으로부터 파리 떼가 새까맣게 쏟아져 몰려오는 것이다. 여의사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허둥지둥한다. 그런데 ‘참 사람’들은 환성을 지른다. 무척 좋아한다. 파리떼가 덤벼들기 시작한다. 여의사는 손을 휘젓고 몸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파리 떼와 싸운다. 그의 공격에 맞아 죽는 파리들도 많다. ‘참 사람’들이 여의사를 만류한다. 그러지 말고 옷을 벗고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한다. 여의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참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몸에 조금 걸쳤던 쪼가리조차 벗어 던진다. 그리고 몸에 힘을 풀고 가만히 서 있는다. 파리 떼가 새까맣게 몸을 뒤덮었다. 얼마 후 파리들은 일제히 어디론가 날아간다.
이런 일이 다시 닥쳐왔다. 여의사는 온갖 역겨움을 참고 옷을 벗고 몸을 내맡겨 보았다. 파리들이 몸에 앉기 시작한다. 눈을 슬며시 뜨고 제 몸뚱이를 보았다. 마치 까만 갑옷을 입은 것 같았다. 파리들은 열심히 제자리에서 움직이며 무언가를 한다. 그러더니 일제히 날아간다. 이게 웬 일인가? 자기 몸이 깨끗해진 것이다. 머리도 감겨 주고 귀 속, 코 속 모두 깨끗하게 씻어 준 것이다. 참으로 오랜 만에 때밀이의 도움을 받은 사우나 목욕을 한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파리 같은 것을 왜 만드셨을까? 쓸데없는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쓸데없는 짓을 하셨다. ‘참 사람’들은 파리와도 유기체였다. 더불어 살고 있었다.
오늘 새벽 이 원고를 쓰고 있는데 내 책상머리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우리 집에는 파리가 없다. 그런데 웬 일로 내 앞에 파리가 있다. 이것을 잡을까, 그냥 놓아둘까, 죽일까, 더불어 살까? 어떻게 했겠는가? 옆에 있는 신문지를 말아서 잽싸게 때렸다. 파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다. 나는 그래서 ‘무탄트’ 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명령하신다.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훗날 유대인들에게 큰 짐이 되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일’이란 그러면 무엇인가? 일이란 무거운 것을 든다거나 그런 것이다. 무거운 것이란 얼마의 무게일까? 단추를 한 개 달 만한 실을 바늘에 꿴 무게 이상의 무게를 가진 것을 들면 안식일 성수를 안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규제가 생기게 되었다. 안식일 성수가 좋고 기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일 성수 명령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너도 일하지 말아야 하지만 너의 아들딸도, 남종도 여종도 일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나아가 네 집의 소나 나귀나 어떤 집짐승에게도 일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너희는 쉬고 다른 사람이나 짐승들에게는 일을 시킨다면 이미 거기에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깨어진 것이다. 강조점은 ‘너, 쉬어라’는 데 있지 않다. 신분의 차이가 생기고 그래서 차별이 있게 되었지만, 누구는 주인이 되고 누구는 남종, 여종이 되었지만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요 믿음이다. 심지어 짐승까지와도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요 믿음이다.
‘그렇지 않은 세상을 너희가 경험했지 않느냐? 더불어 함께 살지 않는 세상을 너희가 경험했지 않느냐?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를 생각해 보아라. 거기에 기쁨이 있었더냐, 감사가 있었더냐, 사는 즐거움이 있었더냐?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끌어 냈다. 그랬으니 너희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이상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남종도, 여종도, 식객도, 소나 나귀도 모두 쉬게 하라는 명령을 주시고는 이렇게 마감하신다.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하나님의 이상은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세상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라. 여기, 이 땅에 불평등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출애굽시키실 것이다. 그래서 기어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