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11 예수의 영성생활 목표 – 1993년 6월 14일, 김상근 목사

9월 12, 2026

예수의 영성생활 목표

마태복음 4장 1-11절 /도시빈민 목회자 교육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 사화(史話)는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보도하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세 가지 시험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의 마지막 시험이 누가복음에서는 두 번째 시험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사탄 또는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것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였다. 예수의 시험은 그가 하나님 나라 운동,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그의 사역의 이념을 점검받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역의 원칙이 올바로 확립되어 있는가를 시험받는 것이라는 말이다. 적어도 이 시험을 통과해야 그는 그의 사역을 올바로 수행할 자격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가 시험을 받았느냐?’ 하는 역사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하겠다. 문제는 예수께서 이 시험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시험을 받기 위해 성령의 인도로 빈들로 가셨다. 이것은 신명기 8장 2절을 연상시키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인가를 광야에서 40년간 시험하셨다고 보도하고 있다. 광야에서 40년의 유랑 기간 동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신실성을 시험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함으로써 죄를 범하였다.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시험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마가복음에서는 40일 동안 내내 사탄에게 시험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40일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에 관한 수많은 사례들이 성서의 전통 속에 나타나 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하면서 주님과 함께 사십 주야를 지냈다(출 34:28).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는 빈들에서 사십 주야 동안 천사들의 음식 시중을 받으면서 방황하였다(왕상 19:1-8). 이스라엘 민족은 사십 년 동안 하나님에게 이끌리어 빈들에서 편력하였다(신 8:2).

예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셨다는 보도는 그가 일생 동안 영성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집약적으로 보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영성생활을 철저히 수행하셨다는 말이다. 악마에게 시험받는다는 사상은 구약성서에도 이미 나타난다(삼하 24:1). 악마는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적대자다. 예수는 그의 메시아적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그의 직무에 관하여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셨다. 악마는 바로 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려고 했다. 예수께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홀로 기도하셨다. 그의 제자들을 선택하기 전에 예수는 산에 들어가 철야 기도를 하셨다(눅 6:12).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셨다(막 14:32-42). 기도야말로 예수가 시험을 이기고 그의 직무를 수행할 능력을 얻는 비결이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귀신들린 아이를 치료하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부류는 기도로 내쫓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내쫓을 수 없다”(막 9:29)고 가르치셨다. 우리에게 영성 훈련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나서 배고픔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악마의 첫 번째 시험이 제기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착취 정책으로 인하여 구조적인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대는 로마에게 매년 600달란트나 되는 거액을 상납해야 했고 각종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산헤드린 최고 의회는 로마 세력을 등에 업고 사복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특히 갈릴리 농민들은 소작농이나 소농으로 전락하여 유대 지방의 부재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다.

‘경제’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젤롯당 운동이 로마에게 납세를 거부하면서 궐기하고 예루살렘에 쳐들어갔을 때, 채무 장부를 불 지르고 사제 귀족들과 지주들을 숙청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스스로 메시아라 일컫는 메시아 참칭자들은 경제문제의 해결을 약속하면서 여기저기서 출현하여 백성들을 선동하였다. 굶주린 민중이 기다린 것은 경제 문제의 해결사로서 메시아였다.

사탄은 예수에게 그런 ‘경제적 메시아’가 되어 보라고 시험하였다. 그것은 물신숭배, 즉 경제제일주의를 선택하라는 도전이다. 그것은 돈만 벌면 된다는 사고이고, 착취를 통해서라도 소유를 늘리면 된다는 유혹이다. 정의와 나눔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웃은 착취의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주의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는 신명기 8장 3절의 인용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물론 경제 문제의 중요성을 모르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삶에서 경제의 필요성을 인정하신 발언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똑같은 차원에서 창조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는 존엄한 파트너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잘 아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성은 먹고사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수준에까지 성장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만이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에 응수하셨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이 경우에 서로 나누라는 것이다. 나눔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가진 것의 공유와 나눔의 실천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시험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시 91:11-13).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가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 악마의 요구였다. 예수의 성서 인용으로 패배한 악마 자신도 성서를 인용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예수더러 쇼를 위한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의 능력을 현시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마술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단연 거부하였다. 그는 ‘기적’을 행하여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았고 자연 기적을 행하였으나, 그 모든 기적 행사들은 병사에 사로잡혀 있는 병자들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 12:39)라고 대답함으로써 그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순간에도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마 27:42)라고 조롱하였을 때에도 무력하게 죽음을 감수하였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회성장주의 병에 걸려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교인만 많이 모이게 하면 된다는 성장제일주의 병이 만연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가 자본주의적 경쟁주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교회 성장이 교회의 목표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올바른 교회 성장은 교회가 그 선교적 목표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는 결과여야 할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두 번째 시험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신 6:16)고 반박하였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매우 높은 산으로 예수를 이끌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이며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제안한다.

사탄은 이 세 번째 시험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대결해 온다. 악마에게 예배하기만 하면 그 모든 권력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사실 악마는 이 시험에서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권력욕’을 이용한 악마의 간교한 책략이다. 예수에게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어 보라고 유혹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악마에게 예배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권력을 차지해 보라는 세속적인 도전장이라 하겠다.

권력제일주의는 이웃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힘의 논리는 약자가 강자를 섬겨야 한다는 이념이다. 여기서 약자는 강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든지 자기만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권력의 노예가 된다.

교회가 권력 지향적이 될 때 그 교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총회장 선거에 수억의 돈을 뿌린다는 교단도 있다고 하니 개탄할 노릇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교회마저 이용하려는 자들이 늘어 가고 있다.

평생을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이 그것도 교회의 장로라는 사람이 대권을 잡기 위해 여당으로 백기를 들고 들어가서 급기야 대권을 잡았다. 그가 신한국 건설을 위해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뜻있는 사람들은 회의를 하고 있다. 이념 없는 개혁은 내용 없는 개혁, 형식적인 개혁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 악마에게 예배하는 그런 속된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세 번째 시험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 6:13) 하고 악마를 꾸짖어 물리치셨다.

사랑하는 도시빈민교회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버렸다. 무엇이 되고자 함을 버렸다. 그러나 여러분의 가슴속에 버림에서 온 쓸쓸함이 있는가? 아쉬움이 있는가?

단호한 말로 물리치라. 공유와 나눔이라고.

단호한 말로 물리치라. 큰 교회가 아니다, 작은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교회를 지향한다고.

단호한 말로 물리치라. 권력의 힘을 빌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영성으로 우리의 목회 현장에 설 것이라고.


[회상 노트]

사회의식이 강한 신앙인은 자칫 방종적으로 산다는 지적을 받는다. 자기에게 철저하지 않다는 비판을 내내 받는다.

목회자들은 자기의 목회 현장에서 강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억눌려 있기 마련이다. 그 현장을 떠나면 ‘자유’를 누려보려는 강한 욕망에 압도당한다. 교육원이 그 ‘자유’ 실현의 장으로 가끔 둔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회선교를 하는 우리에게 영성(靈性)이 없다면 우리는 참다운 개혁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교육원은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참 자유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기도 해야 한다.

도시빈민 목회를 하는 동역자들을 나는 한없이 존경한다. 자기를 버리는 결단이 없이는 그 목회의 길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민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살겠다는 그 거룩함에도 악마는 여지없이 침투한다. 그들의 목회를 단순한 경제운동으로 오도한다. 그걸 통하여 자기가 무엇인가가 되고자 함으로 유혹한다. 아니, 스스로 오도당한다. 스스로 유혹당한다. 우리의 죄성(罪性)이다.

영성이 없는 사회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 영성이 없는 빈민목회도 성공할 수 없다. 성공은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 성공일 것이다. 그것이 영성이다. 이를 강조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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