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김재준의 『낙수』(落穗)
學窓餘祿(학창여록)
實在(실재)의 探求(탐구) - 傳道書讀後感(전도서독후감)
斷想(단상)과 祈願(기원)
성서에 대한 자료, 기독교 역사와 인물에 대한 자료, 그리고 목회적 설교 자료를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實在(실재)의 探求(탐구) - 傳道書讀後感(전도서독후감)
- 본 내용은 김경재 교수가 집필한 『김재준 평전』(2001)에 수록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김호병 씨와 채성녀 씨의 2남 4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남
서당 훈장이셨던 부친으로부터 『천자문』, 『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읽고 몸에 익히면서 가풍을 따라 유교의 세계에서 소년 시기를 자람
9살 때 경원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13~16세)
회령군청 간접세과 고원으로 취업
18세 때 장석연 씨의 맏딸 장분여와 결혼. 이후 일생을 해로하면서 3남 3녀를 낳고 기름
회령군청에서 웅기 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 웅기에서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 지사들을 수시로 보며 가냘픈 민족 의식이 싹트기 시작
웅상 출신 청년 전도사로 서울 남대문교회 송창근 전도사의 방문을 받고, 나라와 교회를 생각하고 뜻을 품음. 웅기금융조합 사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남
중동학교 고등과에 편입. 서울 YMCA 영어 전수과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 흡수에 전력함. 톨스토이와 성 프란시스 전기 등을 탐독하고 청빈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음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연합 사경부흥회 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기로 결심하고 회심을 경험함. 믿은 지 3년 후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함북 경흥에 귀향하여 용현소학교, 귀낙동소학교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침
일본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고학하면서 자유로운 학풍에서 신학 공부. 1928년 아오야마 신학부 졸업.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을 설계함. 졸업반 때 귀향하여 두만강 유역 교회를 순방 강연함
미국에 유학함. 1928년 9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업하고, 1929년 9월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 편입학. 같은 학교에서 1932년 5월 신학사(S.T.B), 1932년 5월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음. 미국 경제 공황에 직면하여 귀국함. 미국 유학 시절 송창근, 한경직과 특별한 신앙 동지로서의 우의를 굳건히 함
귀국 후 평양에서 3년을 지냄. 1933년 4월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 집사직으로 봉사하다가 1933년 8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음. 1936년 4월 신사 참배 문제와 민족 교육 금지 문제로 숭인상업학교 교유직을 사임함. 이 무렵 순교자 열전 연구에 몰두함. 평양 3년 머무는 기간 동안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 젊은 소장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신학 연구지 『신학지남』에 기고자로 관계를 맺게 되고, 유형기 박사의 『단권 성경 주석』 번역자로서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세 사람 연서로 성명서를 냄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 봉직하면서 3년을 간도에서 청년 교육에 힘씀. 1936년 8월, 은진중학교 교유에 취임. 1937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받음. 1937년 5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월간 『십자군』을 발간함
조선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평양신학교가 폐쇄됨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재정을 기반으로, 조선신학원 설립 기성회가 발족(김대현, 송창근, 김영주, 차재명 중심) 설립 사무 실무 책임자로 김재준 목사가 간도 은진중학을 사임하고 설립 사무를 전담하여 추진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도지사 인가로서 승동교회에서 개교. 설립자 겸 원장에 김대현 장로, 이사장에 함태영 목사, 교수로서 윤인구, 김재준 임명
일제 말기 조선신학원 끝까지 지킴. 일제에 의한 관제 『조선 혁신 교단』 시절(1942)과 조선신학원과 감신의 『합동 강의』 기간 동안에도 조선신학교 교장으로서(1943~46) 학교를 지킴
해방의 기쁨과 함께 8월에 「기독교 건국 이념」 집필 발표. 9월에 천리교 본부 건물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 불하받아 동자동 교사 시대 교수로 일함. 12월에 경동교회를 설립함
송창근 박사가 제4대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교수가 됨. 6월 장로교 남부 총회에 의해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
『십자군』을 속간하여 1951년 8월까지 속간 30호 발간함
6ㆍ25 동란으로 같은 해 8월 송창근 학장 북으로 피랍. 1951년 3월 부산 피난 전시 대학 개강. 부산 항서교회당 및 남부민동 임시 천막 교사에서 수업.
학교명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변경, 김재준 목사 학장 서리에 취임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 장로회 37회 대구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직 파면 선언, 한국신학대학 총회 인준 취소, 한신 출신 교회 취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들의 노회 재심 등을 불법적으로 결의. 대구 37차 총회의 불법성에 저항하여, 같은 해 6월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장로회 38회 호헌총회를 개최. 기독교장로회 탄생
서울 환도 후 동자동 교사에서 학장 서리 겸 교수로서 봉직
1957년 12월,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새 캠퍼스로 입주. 김재준 목사 제6대 학장으로 취임. 캐나다 연합교회 초청으로 순회 답방(1958.8~1959.9)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 수여받음
5ㆍ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권에 의해 60세 정년제 강행으로 동년 9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 및 교수직에서 강제 퇴임. 쌍문동 국민주택으로 이주함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이 됨
한국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추대됨. 9월에 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추대됨. 한신학원 제7대 이사장으로 피선(1966.9~1970.9)
한ㆍ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 운동을 한경직 목사와 주도하여 영락교회에서 대중 강연, 교회의 대사회 참여 운동 시작
월간지 『제3일』 창간. 박형규, 현영학, 서광선, 이문영,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이 동인으로 참여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됨. 12월에 유신헌법이 발포됨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장으로 추대됨.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이병린)
캐나다로 출국. 11월에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직 수임(2회 연임)
캐나다에서 『제3일』 속간. 1981년 6월호까지 속간 60호 발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됨
귀국
전국 국토 순례. 『재야 원로 모임』에 참여하여 민주화 운동과 평화 통일 운동을 지속함
고문으로 살해당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이 됨.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유언으로 남김
서울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8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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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0~45.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125~131. (여기에는 旅記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十二月(12월) 十七日(17일), 싸늘한 바닷바람에 옷삭 떨며 釜山驛(부산역)에 나리니 어떤 늙은 할머니 한분이 따라 나렸으나 어디 갈줄 몰라 망사리고 있기에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주머니 끈을 풀고 封套(봉투)조각을 끄집어낸다.
「凡一町(범일정) 三八四番地(384번지)」
나도 처음이라 지향을 몰르는 터이므로 驛派出所(역파출소)에 물으니 向(향)하여 右便(우편)으로 가는 電車(전차)를 타고 終點(종점)에 가서 나리라는 것이였다. 終點(종점)에서 나려서 또 派出所(파출소)에 들어 가니 踏切(답체)[2]를 건너 한참 가다가 또 派出所(파출소)가 있으니 거기서 물어보라 한다. 무던히 오래 걸어 겨우 그 派出所(파출소)를 찾었더니 바로 저기가 凡一町(범일정) 三八四番地(384번지)이지만 그 番地(번지) 안에 집이 六十戶(60호) 以上(이상)된다고 한다. 벌서 해는 저물어 컴컴한데 이 올랑졸랑[3] 널조각으로 무어지는 개천가 오막사리를 一一(일일)히 뒤질수도 없고해서 그 中(중) 古參者(고참자)라는 집에 들어가 이름을 대이여 어디쯤 되는가 물었다. 개천가로 다섯 번채 집에 가 보란다.
『여기가 三百八十四番地(3백8십4번지) 아모네 집인가요?』
젊은 婦人(부인)이 나오며 『여기는 三百八十四番地(3백8십4번지)가 아니야요』 『그럼 몇 番地(번지)인가요』 『三八四(384) 番地(번지)요』 하고 말시가 當當(당당)하다. 『그렇습니까』 하고 도로나왔다. 番地(번지)는 何如間(하여간) 그집에는 우리가 찾는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었다 할수없이 그 老婆(노파)를 다시 古參者(고참자)라는 광주릿집 主人(주인)한테 마끼고 나는 도로 내길을 걸었다.
집떠난 孫子(손자)를 찾노라고 그렇게 어이없는 길을 떠난 것이였다.
『아이고 나 때문에 이렇게 手苦(수고)하시고 이 恩功(은공)을 무어로 갚으리까. 아이고 고마운게요 고마운게요!』
하며 진심으로 치사를 한다. 古參者(고참자)라는 그 사람은 침대 광주리를 틀어파는 사람인 모양인데 素性(소성)이 어떤 친구인지도 몰르고 그 어쩔줄 몰르는 老婆(노파)를 마낀 것을 나는 그윽히 不安(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차라리 派出所(파출소)에 맛겼더면 하고 아주 멀리까지 와서야 생각나서 도로 갈가하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가려는데는 佐用町(좌용정) 七九六(796) 宋兄(송형)이 寓居(우거)하는 聖貧庵(성빈암)이다. 山(산)등상이에 있다는데 어두운 첫길이라 알길이 漠然(막연)하였다. 또 派出所(파출소)에 들어갔다. 한참 調査(조사)를 받었다.
마침 그 派出所(파출소) 給仕(급사)[4] 노릇하는 열 살쯤 된 少年(소년)이 내가 案內(안내)해 주마고 自請(자청)한다. 나는 懷中傳燈(회중전등)을 하나 사가지고 그 少年(소년)을 딸어 섰다.
『나두 예배당 당겼어요, 주일학교도 잘 다니고. 그랬는데 二年前(2년전) 이 派出所(파출소) 給仕(급사)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이럭저럭 못나가게 되어서 인저 하나님 은혜를 작구 잊어 버려요』 하고 이 少年(소년)은 아주 어른답게 이야기를 부친다. 찾는 내가 牧師(목사)요 찾어가는 宋兄(송형)이 또한 牧師(목사)라니까 마음 그윽히 이전 생각이 나서 아마 自願手苦(자원수고)하는 모양이었다.
山(산)등상이에 올라가서 이집 저집 傳燈(전등)을 빗최가며 門(문)패를 조사하다가 마침 目的(목적)한 宋兄(송형)의 庵子(암자)을 發見(발견)하자 그 少年(소년)은 어느틈에 벌서 쏜살같이 달어나 어둠 속에 사라지고 말었다. 나는 고맙다고 치사할 틈도 없었다. 그는 가장 純粹(순수)한 好誼(호의)에서 나온 그의 奉仕(봉사)에 어떤 傷處(상처)를 받을가 두려워한 것이였다.
나는 그 少年(소년)이 무척 귀엽고 고맙게 생각되였다.
十二月(12월) 十九日(19일). 宋兄(송형)과 함께 釜山(부산) 복판을 걸어 龍頭山(용두산)에 올라가 우아래를 바라보았다. 스탄리 쭌스의 有名(유명)한 말 『不可避(불가피)를 福音化(복음화)하라』한 그길 밖에 남은 거 없다. 肉身(육신)으로 가난한 者(자)에게 靈(영)으로 富(부)하게 하는 그것이다. 一簞食(일단사), 一瓢飮(일표음)[5]으로 在陋巷(재누항)[6]이라도 不改其樂(불개기락)[7]하는 道心(도심)이 있으면 그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者(자)일 것이다.[8] 이것이 돌아 右(우)편 앞으로 하여 落伍者(낙오자)가 前頭(전두)에 서는 奇蹟(기적)이다.[9]
사람들은 잠간 서서 自己(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를 좀더 깊히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분주히 달음질 친다. 그런 것은 한가한 선비들께 맡겨두자. 우리는 돈을 追求(추구)한다. 우리는 勢力(세력)을 獲得(획득)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집은 높아지고 그들의 밭은 넓어지고 그들의 돈지갑은 퉁퉁해진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들은 富(부)한가? 그들은 有力(유명)한가? 그들의 內面生活(내면생활)은 食慾(음식) 以外(이외)에 다른 것이 없고 교만이 마음의 王座(왕좌)를 占據(점거)하였으니 無慈悲(무자비)가 그 찬바람을 뽑고 있을 뿐이다. 天下(천하)를 차지한다 한들 그의 內面生活(내면생활)이 空虛(공허)하면 무엇이 有益(유익)하랴. 그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者(자)이다.
宋兄(송형)의 말을 듣건대 그가 兩年(양년)[10]동안 이곳 저곳에다가 託兒所(탁아소), 幼稚園(유치원), 無産兒童學院(무산아동학원), 施療所(시료소) 等(등)을 設置(설치)여 아이들을 건사하기 始作(시작)했는데 그 아이들은 勿論(물론), 그 아이들 부모에게까지 福音(복음)의 손은 至極容易(지극용이)하게 닿을 수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 事業設置(사업설치)했던 곳마다 지금은 敎會(교회)가 新設(신설)되어 當當(당당)히 自立(자립)한 곳도 數個所(수개소) 있다 한다.
『兄弟(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世上(세상)의 가난한 者(자)를 擇(택)하여 믿음에 豊盛(풍성)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者(자)에게 허락하신 나라의 後嗣(후사)가 되게 하시지 않으셨느냐』(야고보 2:5)한 聖句(성구)가 생각난다.
우리에게 傳道(전도)의 熱誠(열성)이 없으며 도 傳道(전도)의 方法(방법)에 拙(졸)하여[11] 그들의 心情(심정)에 미치지 못한 恨(한)은 있을망정 그들 自身(자신)은 그리 막힌 사람들이 아니다.
茶(차)를 마시고 다리를 건너 絶影島(절영도)의 그늘을 밟았다. 날은 따스하고 바닷물은 푸르다. 뱃사공들의 그물 걷는 노래가 기운차게 울려온다. 고요한 牧場(목장) 위에 봄구름처럼 흘러가는 牧歌(목가)도 좋지만 여기여차 저어가는 波浪(파랑)[12]위의 漁歌(어가)도 굳센 情趣(정취)가 버리기 어렵다.
한참 가노라니 온통 술집과 私娼(사창)들만 사는 거리가 展開(전개)된다. 보기에 지긋지긋한 野俗(야속)[13]스럽게 肉感的(육감적)인 젊은 女子(여자)들이 길모퉁이에 서 있다. 우리는 조그마한 구멍가게 모양으로 된 藥房(약방) 비슷한 집에 들어갔다. 그 가게 主人(주인)은 C라는 中年(중년) 傳道師(전도사)라고 宋兄(송형)이 紹介(소개)하였다. 그는 미쳐 人事(인사)도 하기 전에 옷을 주워 입고 나서 우리를 三中井(삼중정) 食堂(식당)으로 인도하였다. 미상불[14] 맘성 좋은 친구로구나 하는 인상을 주는 친구였다. 그는 醫生(의생)으로서 相當(상당)한 經驗(경험)이 있기 때문에 收入(수입)은 어느 醫師(의사)에 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돈벌이 하는 醫生(의생)이라는 이보다도 그 동리 술집 아가씨네의 아버지라는 데에 그의 本職(본직)이 있다 한다. 그는 그곳 警察署長(경찰서장)에게 交涉(교섭)하여 抱主(포주)와 女子(여자)들과의 契約(계약)을 更正(경정)[15]하며 또 機會(기회)있는대로 그 女子(여자)들을 贖(속)하여 새 살림을 차리게 하는 일과 病(병)에 걸리면 내 딸처럼 돌보아 주는 일 等(등)에 그의 收入(수입)의 거의 全部(전부)를 써버린다 한다. 그리하여 그 거리 遊女(유녀)[16]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宋兄(송형)의 聖貧學社(성빈학사) 事業(사업)에도 全力(전력)을 기울여 도왔으며 敎會經理(교회경리)에도 있는 힘을 다 쓴다. 그는 하나님만 알고 돈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생기는 돈을 그날 그날로 다 흩어버리고 그 自身(자신)은 家族(가족)과 함께 如前(여전)히 이 구멍가게의 뒷골방에 不變(불변)의 貧者(빈자)로 지낸다. 다니며 보노라면 아니꼬운 친구도 있지만 이렇게 갸륵한 친구도 많은 것을 감사 안할 수 없었다.
宋兄(송형) 同行(동행). 버스로 海雲臺(해운대)에 向(향)하였다. 똥장구 달구지를 지나고 지나 흰실같이 늘어진 新作路(신작로)에 먼지를 날리며 달아나는 버스여행도 무던히 愉快(유쾌)하였다. 大和室(대화실)이란 旅館(여관)에 들었다. 溫泉(온천) 푸-르에 잠겨 반나절이나 지냈다. 旅館(여관)에도 溫泉休憩室(온천휴게실)에도 20左右(좌우)의 꽃다운 處女(처녀)들이 눈으로 웃음으로 노래로 이야기로 가고 오는 나그네의 피곤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나는 休憩室(휴게실) 煖爐(난로)옆에 가로누어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靑春(청춘)의 感激(감격)을 더듬어 보았다.
靑春(청춘)! 그들의 눈에는 꿈이 서리어 있다. 그들의 가슴엔 詩(시), 그들의 입에는 노래가 있다. 그들의 靈(영)은 부드럽다. 그들은 嫩(눈)[17]한 靈(영)의 觸手(촉수)로 무엇을 붙잡으려고 憧憬(동경)한다.
『妾(첩) 御正月(어정월)[18]を 迎へるのが こわくて ならないのよ』[19]하고 安子(안자)란 키적고 몹시 상냥스럽게 생긴 處女(처녀)가 말한다.
『몇살이냐?』 하고 물었더니
『싫어요!』 하고 목을 움츠리며 돌아 앉다가
『스물하나』 하고 대답한다. 설새기 싫을 것도 事實(사실)이다.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20]이라. 靑春(청춘)은 그리 오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오래지 않아 시들어질 꽃봉오리를 가슴에 안고 未知(미지)의 世界(세계)의 門(문)앞에 서서 待望(대망)하며 떨고 있다. 人間(인간)으로서 다시 없는 가장 尊嚴(존엄)하고도 안타까운 情調(정조)다.
나는 내 靈魂(영혼)이 벌써 硬化病(경화병)[21]에 걸려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施律(시율)에 맞추어 울리기에는 나의 心琴(심금)은 너무나 굳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永遠(영원)히 靑春(청춘)을 保有(보유)하고 싶다.
『아, 靑春(청춘)의 幸福(행복)이여』 하고 나는 아무 로맨스도 없는 나의 過去(과거)를 돌아보며 쓰린 웃음을 던지었다.
아니다. 나에게도 로맨스도 많았다. 그것은 主(주)님을 向(향)한 로맨스였다. 나는 나의 있는 情熱(정열)을 다 바쳐 主(주)님을 仰慕(앙모)하였다.
앗시시, 푸랜시스의 心情(심정)이 곧 나의 그때 心情(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近者(근자)에 와서 거의 非人間的(비인간적)이라고 하리만큼 感情(감정)의 痲痺(마비)에 걸리어 있다.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다. 났다, 죽었다, 앓는다, 괴롭다하는 온갖 人間生活(인간생활)의 斷面(단면)이 나에게는 거의 뜬 구름같이 보인다. 좋게하자면 「達觀(달관)」이랄지 모르지만 언찮게 생각하면 아주 鈍物(둔물)[22]이 되고만 셈이다. 이렇게 人間生活(인간생활)의 實感(실감)을 잃고서야 文學(문학)도 宗敎(종교)도 結局(결국) 한 개의 化石(화석)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感激(감격)을 도로 찾아야 하겠다.
12月(월) 20日(일)
宋兄(송형)을 自動車(자동차)로 釜山(부산)에 보내고 나는 停車場(정거장)에 가서 京城行(경성행) 車票(차표)를 샀다. 車票(차표)에 「釜山鎭經由(부산진경유)」라고 했길래 나는 慶州經由(경주경유)로 가야 할텐데 잘못됐다니까 出札係員(출찰계원) 몹시 깔보며 나무람 하였다. 『나는 여기서 京城票(경성표) 달라면 의례 慶州經由(경주경유)로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그려. 몰라 그렇게 했으니 未安(미안)합니다』 하고 紳士的(신사적)으로 될려고 무던히 애써 말씀을 사뢰였다.
그는 더 한층 輕蔑(경멸)히 여기는 모양이어서
『몰라서? 시!』 하고 한참 쳐다보더니 慶州經由(경주경유)로 票(표)를 바꾸어 써서 出札(출찰)밖으로 휙 팽게친다. 큰 大監(대감)이나 된 듯이 뽐내는 것도 꼴사납지만 旅客(여객)[23]에 對(대)하여 그렇게 失禮(실례), 不親切(불친절)한 驛員(역원)은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골이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을 꿀꺽 참았다. 그러나 어느틈에 벌써 『敎養(교양)없는 건 할 수 없어!』 하고 毒(독)품은 辱(욕)을 중얼거려 버렸다.
『나는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했어!』
『내가 좀더 큼직했다면 왜 이런데 다 憤(분)을 낼건가』 하고 時間(시간)도 아직 한 時間(시간) 남았길래 혼자 바닷가에 나갔다.
白砂(백사)[24]에 부서지는 고요한 물결, 56島(도) 스쳐가는 흰돛 좋기는 하련만 事實(사실)은 아무 感興(감흥)도 일지 않는다.
『앉으면 海月(해월)이오,
누우면 山月(산월)이라.
가만이 눈감으면
胸中(흉중)에도 明月(명월)있다.
五六島(오륙도) 스쳐가는 배도
明月(명월) 실고.』
한 春園(춘원)의 海雲臺(해운대) 紀行文(기행문)의 一節(일절)이 제절로 읽어진다. 그러나 어렸을 때 春園(춘원)의 紀行文(기행문)에서 읽던 想像(상상)의 海雲臺(해운대)는 아무리 더듬어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눈에 비취는 바닷물, 모래언덕 솔밭, 그리고 논두렁 旅舘(여관)집, 그런 것들은 다만 그런 것들 以上(이상)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에 春園(춘원)의 詩(시)가 없으니 海雲臺(해운대)가 나에게 무슨 詩(시)를 주랴! 나는 모래위에 印(인)친 발자욱을 돌아보며 내 靈魂(영혼)의 가을, 꿈이 사라진 내 가슴의 憤怒(분노)을 슬퍼하면서 海雲臺(해운대)를 떠난다.
車(차)는 慶州(경주)를 向(향)하여 달음질 친다. 숨었다 보였다 하는 東海(동해)의 푸른 물결은 진실로 아름답다.
慶州(경주)! 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곳은 나의 聖地(성지)다. 나는 敬虔(경건)한 巡禮者(순례자)다. 午後(오후) 3時(시) 車(차)는 慶州驛(경주역)에 닿았다.
爲先(위선) 安東旅舘(안동여관)에 가방을 들여다 놓고서는 자리에 앉아도 보지 않고 門(문)밖에 뛰어 나갔다.
선물파는 집에 들어가 「慶州(경주)의 史蹟(사적)과 傳說(전설)」이란 册(책)을 사들고 그 옆에 있는 鳳凰臺(봉황대)라는 古墳(고분)(무덤이라기보다 山(산)이라는 것이 더 實感的(실감적)이다)에 올라가 두루 내려다 보았다. 百萬生靈(백만생령)이 욱신북신 하던 古都(고도)인 만큼 그 範圍(범위)가 무던히 넓다.
보아야 할 古蹟(고적)은 五里(5리), 十里(10리), 十五里(15리) 이렇게 東西南北(동서남북)에 두루 널려 있어서 마치 누구의 庭園(정원)이나 漫步(만보)하듯이 아주 재미스럽게 걸어 다닐 줄로만 생각한 나의 幻像(환상)은 아주 깨뜨려지고 말았다. 나는 이틀동안 或(혹)은 自動車(자동차)로 或(혹)은 汽車(기차)로 或(혹)은 徒步(도보)로 巡禮(순례)할 수 있는 데까지 巡禮(순례)하였다. 鮑石亭(포석정)[25], 蘿井(나정)[26], 三體石佛(삼체석불)[27], 五陵(오릉)[28], 半月城(반월성)[29], 石氷庫(석빙고)[30], 始林(시림)[31], 瞻星臺(첨성대), 雁鴨池(안압지)[32], 皇龍寺址(황룡사지)[33] 芬皇寺址(분황사지)[34], 財買井(재매정)[35], 蚊川(문천)[36]가의 허물어진 다리터들, 皇南里(황남리)의 王陵(왕릉)과 祀堂(사당)들 그리고 佛國寺(불국사), 石窟庵(석굴암) 等(등)을 보았다. 이 모든 데에는 千年後(천년후) 王孫(왕손)의 가슴속에 눈물이 맺히게 할만한 由來(유래)와 傳說(전설)이 감돌고 있다. 나는 味鄒王陵(미추왕릉)에 절하고 財買井(재매정)의 물을 마시고 閼英井(알영정)[37]을 들여다보고 始林(시림)의 늙은 나무를 만지며 瞻星臺(첨성대) 돌에 뺨을 대어보았다. 千年前(천년전), 幽靈(유령)들이 이곳 저곳서 뛰쳐나와 나를 에워싸고 춤추는 것 같았다.
1940년 12월 「昭和(소화) 一五(15)」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39~40.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123~124.
벌써 1年前(년전) 처음 豆滿江(두만강)을 건너 滿洲(만주)에 이르다. 車內(차내)의 銃(총)잡은 兵丁(병정)이 朝鮮(조선)서는 못보던 現象(현상)이다. 그러나 처다 보아도 氣魄(기백)이 없어 무시무시한 感(감)을 주지 않는 것만은 多幸(다행)이랄까. 그 中(중)에는 고단한 몸에 마음조차 풀려서 꿈나라에 逍遙(소요)하는 이도 있다.
어허 저 兵丁(병사) 어인일고
銃(총)잡고 입벌리고 춤흘려 옷 적시네.
두어라 王道樂土(왕도락토)[1]니 맘놓은 들 어떠리.
여기가 龍井(용정)이래서 나려 驛門(역문)을 나오니 馬車(마차)를 타라고 자심히[2] 勸(권)한다. 캄캄한 밤거리를 달리는 幌馬車(황마차)[3]의 搖鈴(요령)[4]소리가 異國風情(이국풍정)을 자아내어 길손의 마음을 애처럽게 군다.
幌馬車(황마차) 지렁지렁 말굽소리 시산하이
캄캄한 밤거리를 마음없이 달리노라.
동무여 流浪人生(유랑인생)이어니 어듸간들 못살리.
어느덧 늦인 가을이 회리바람처럼 지나버리고 눈보래 치는 겨울이 닥처오다. 한번 나린 눈은 깔축[5]없이 왼 겨우내 땅우를 덮고 있다. 집들은 등을 꼬부리고 눈속에 파무치여 마치 큰 무덤을 보는 것 같다. 모도다 草(초)집인 까닭이다.
눈속에 一點黃色(일점황색) 무덤인가 하였더니
굴둑에 연기나니 집일세 分明(분명)하이
그래도 내결레[6] 저기 있다니 찾어보고 가리라.
봄에 꽃동산 여름에 綠陰(녹음)은 예나 제나 一般(일반)이다. 그러나 가을이 되여 沃野千理(옥야천리)[7]에 穀浪(곡랑)이 물결칠때면 『아 진실로 滿洲(만주)는 우리 살 땅이다』 하고 故土(고토)에 돌아온 기쁨을 느끼지 않는 이 없을 것이다.
萬頃(만경)[8] 곡식바다 한울가에 물결치니
물려주신 先塋基業(선영기업) 훌륭도 하옵건만
어찌타 다 팔아먹고 半島(반도)산골 기여든고.
땅이 기름진데 祖上(조상)네 살던 데라. 우리네의 再移住(재이주)란 반가운 일이지만 才勝德薄(재승덕박)[9]하여 欺瞞(기만)과 不敬虔(불경건)이 이땅을 더럽히니 이대로만 나간다면 罪(죄)와 死亡(사망)과 賤待(천대)가 또 다시 우리를 붙잡을 것이다. 嗚呼(오호)라 뜻있는 靑年(청년)은 지금에 힘과 정성을 기우려 그리스도와 그 救贖愛(구속애)를 傳(전)하지 않겠는가? 동리동리마다 祭壇(제단)을 쌓고 勞働(노동)과 禮拜(예배)로 平和(평화)의 동산을 가꾸지 않으려나?
기름진 이 땅 흙이 거륵도 하옵건만
피흘려 적신 것만 千秋(천추)에 恨(한)이온저
동무여 흰옷 흰마음에 손마자 희게 씻고
가는 곳곳마다 聖壇(성단)을 세우과저!
- 10月 20日
- 詩篇(시편) 第八十四(제84) -
『신학지남』 15권 6호, 1933. 11.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21~422.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7권, 280~282.
萬軍(만군)의 여호와여 당신의 게신곳은 참말로 情(정)답습니다.
내 靈魂(영혼)은 기막히게도 여호와의 殿堂(전당)을 思慕(사모)합니다.
내 마음과 내 몸은 歡呼(환호)의 노래를 기운껏 부르렵니다. 살어게신 하나님께!
참새조차 집을, 제비도 새끼 둘 둥이를
찾었오이다. 당신의 祭壇(제단)가에서
萬軍(만군)의 여호와 내 임군 내 하나님
오 당신 殿(전)에 居(거)하는 이의 幸福(행복)이여!
저들은 끊임없이 당신을 讚揚(찬양)하도소이다.
오 당신안에서 힘얻는 이의 幸福(행복)이여!
(시온가는) 큰 길이 저 마음에 있도소이다.
「바카」의 골자구니를 지나면서도 (註一)
샘솟는 곳을 맨들리이다 -
이른비가 祝福(축복)으로 감싸줄 것이외다.
가도록 새 힘을 얻어 저들은 가리이다.
시온에서 하나님을 뵈오리이다.
오 萬軍(만군)의 하나님이여 내 祈禱(기도)를 들어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우리소서.
오 하나님 우리의 방패(楯[순])를 보아주소서.
당신 기름부은이의 낯을 살펴 보소서.
당신 殿(전)의 하로는 千年(천년)보다 났도소이다.
惡人(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집 門(문)간에 門(문)직이 되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日[일])요 또 방패(楯[순])외다.
은혜와 榮譽(영예)는 여호와가 주시나이다.
바른길 걷는 者(자)에게는 온갖 좋은 것 애끼지 않나이다.
오 萬軍(만군)의 여호와 당신을 믿는 이는 福(복)있는 者(자)이온지!
(註一) 「바카」가 「운다」의 動詞完了形(동사완료형)이지마는 여기서는 名詞(명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바카」의 分詞(분사)는 「보케」오 其外(기외)의 名詞形(명사형)에는 「베케」 「보키」 「바코트」 等(등)은 있으나 「바카」가 그대로 名詞(명사)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여기 「바카」는 「운다」 動詞(동사)와 關係(관계)지을 것이 아니라 「바카」라는 名詞(명사) 即(즉) 沙漠地方(사막지방)에서 자라는 「발삼」나무를 말함이다. 다시말하면 발삼나무 골자구니 即(즉) 沙漠地方(사막지방)을 지날때에도 이른비의 潤澤(윤택)이 가는 곳마다 샘솟는 오아시스를 맨들어 주리라고 노래한 것인줄 안다.
- 詩篇(시편) 第四十二(제42), 四十三(43) -
「신학지남」 제16권 제1호 (1934.1): 29-31.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19~420.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7권, 278~279.
사슴이 시내물을 渴求(갈구)하듯이
그렇게도 내 靈魂(영혼)은 당신을 渴求(갈구)합니다. 오 하나님!
내 靈魂(영혼)은 하나님을 向(향)하야 목말렀읍니다.
살어게신 하나님을 向(향)히야 -
언제나 나는 가서 하나님을 뵈오리까?
나는 밤낮 눈물로 음식 삼어 지냈읍니다.
「네 하나님이 어듸 있느냐?」고 끊임없이 나의게 빈정댈 때
내가 前(전)에 늘 群衆(군중) 가운데로 지나며
하나님의 聖殿(성전)까지 行列(행렬)을 引導(인도)하던 일!
歡呼(환호)와 讚頌(찬송) 속에서 聖節(성절)지키든 群衆(군중)!
오 이 일들을 나는 追憶(추억)합니다.
그러고 내 靈魂(영혼)을 憂愁(우수)에 잠급니다.
오 내 靈魂(영혼)아 웨 落望(낙망)하느냐?
웨 내 안에서 不安(불안)히 구느냐?
하나님을 기대리라 아직도 나는
그를 讚頌(찬송)하련다. 내 하나님의 救援(구원)을!
오 내 靈魂(영혼)은 落望(낙망)에 잠깁니다.
그러기에 나는 당신을 追憶(추억)합니다-
요단 땅에서 또 헬몬 山(산) 미찰의 언덕에서
당신의 波濤(파도)와 당신의 물결은 모도다 나를 휩쓸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仁慈(인자)를 말슴하시고
밤에는 그의 노래가 나와 함께 하시리이다.
내 生命(생명)의 하나님께 들이는 祝願(축원)의 노래가
내 磐石(반석)이신 하나님께 나는 呼訴(호소)합니다.
「웨 나를 잊으섰읍니까?」
「웨 나는 원수의 壓迫(압박) 때문에 슲어하며 가오리까?」고
내 원수는 나를 비방하며
내 뼈속에 뿌시는 칼을 품겨 줍니다 -
「네 하나님이 어듸 있느냐?」고 끊임없이 빈정대는 것으로
오 내 靈魂(영혼)아 웨 落望(낙망)하느냐?
웨 내 안에서 不安(불안)히 구느냐?
하나님을 기대리라. 아직도 나는
그를 讚頌(찬송)하련다. 내 하나님의 救援(구원)을!
나를 裁判(재판)하소서 오 하나님!
不敬虔(불경건)한 백성을 相對(상대)삼어 나를 변호합소서
거즛되고 悖逆(패역)한 사람에게서 나를 救援(구원)합소서
당신이야말로 내 피란처인 하나님이시온데
웨 나를 모르는체 하시나이까?
웨 나는 원수의 압박 때문에 슲어하며 다니리까?
오 당신의 빛과 당신의 信誼(신의)를 보내주소서
그리하야 나를 引導(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聖山(성산) 당신게신 곳에로 다려가게하소서
그리하야 하나님 祭壇(제단)에로 가게하소서
내 기쁨 내 즐거움인 하나님께로 가게 하소서
거문고로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하나님, 오 내 하나님이여!
오 내 靈魂(영혼)아 웨 落望(낙망)하느냐?
웨 내 안에서 不安(불안)히 구느냐?
하나님을 기대리라 아직도 나는
그를 讚頌(찬송)하련다. 내 하나님의 救援(구원)을!
『신학지남』 16권 2호, 1934. 1.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15~418.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7권, 271~277.
憂愁(우수)에 잠긴 宮殿(궁전)! 英帝國(영제국) 女王(여왕)의 남편되는 알버-트 公(공)은 그 榮譽(영예)의 마즈막 페-지를 다치려하는 때 끊어지는 숨결을 것잡아 입안으로 속삭인 것이 이
『萬世磐石(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이었다.
그린우드(Greenwood) 墓地(묘지)의 大理石(대리석)에 삭인 不朽(불후)의 두어줄 노래는 우리의 心情(심정)에 믿음의 表徵(표징)을 삭여주는 永遠(영원)한 記念塔(기념탑)이다.
“Nothing in my hand I bring [뷘손들고 앞에가]
Simply to Thy Cross I Cling” [十字架(십자가)만 부뜨네]
- 朝鮮譯(조선역) 찬송
一七五六年(1756년) 八月(8월) - 寡婦(과부)된 어머니를 모시고 英國(영국)을 떠나 구경삼아 愛蘭(애란)[1]의 農村(농촌)을 찾어간 十六歲(16세)의 少年(소년) 하나가 있었다. 그는 農村(농촌)의 길을 逍遙(소요)[2]하다가 뜻없이 한 곡간에를 찾어 들었다. 그 곡간 안에서는 마침 한 農夫(농부)꾼이 몇 사람의 다른 農夫(농부)꾼들을 앞에 놓고 熱心(열심)으로 說敎(설교)하는 中(중)이었다. 그 題目(제목)은 「前(전)에는 너의들이 멀리 떠나 있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히 오게 되었다」 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 少年(소년)의 靈魂(영혼)에는 다시 끄지 못할 異常(이상)한 불낄이 타올났다. 後(후)에 그는 이때 일을 回顧(회고)하고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一七五六年(1756년) 八月(8월) 하나님의 使者(사자) 모리스 氏(씨)로 말미암어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主(주)님 앞에 가까이 갔읍니다. 참으로 異常(이상)합니다. 내가 英國(영국)에서 그렇게 오래동안 恩惠(은혜)자리에 있으면서도 體驗(체험)하지 못한 信仰(신앙)을 愛蘭(애란)의 村(촌)구석 곡간속에서 제 이름 字(자)도 변변히 쓰지 못하는 한 農夫(농부)를 通(통)하야 얻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異常(이상)한 일입니다.』
이 無識(무식)한 農夫(농부)꾼의 純眞(순진)한 믿음은 世紀(세기)가 가면 갈사록 더욱 크게 왼 世上(세상) 구석구석마다 울려 지나니 이는 그의 믿음이 이 少年(소년)의 靈(영)에 뿌리 박혀서 「萬世磐石(만세반석)」이란 不朽(불후)의 信仰詩(신앙시)를 誕生(탄생)케 한 까닭이다. 이 少年(소년)의 이름은 어가스터스 탑래디(Augustus Montague Toplady)[3]이다.
이로부터 탑래디 少年(소년)의 믿음은 날로 달로 새로워 一七六八年(1786년) 그는 英國(영국) 뿌로-드 헨뻐리(Broad Henbury)에서 牧師職(목사직)에 나아갔다. 牧師(목사)로 說敎家(설교가)로서의 그는 역시 이 노래에 지지않는 깊은 印象(인상)을 聖徒(성도)의 마음마음속에 색이고 있었던 것이다. 記錄(기록)한 바에 依(의)하건대 탑래디 牧師(목사)의 音聲(음성)은 그대로가 깨끗한 音樂(음악)이었다 한다. 그러고 그 語調(어조)의 鄭重(정중)함, 그 態度(태도)의 快活(쾌활)함, 그 語法(어법)의 簡明(간명)함 모든 것이 聽衆(청중)으로 하여금 거룩한 感激(감격)에 눈물짓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한다.
그는 主(주)님의 빛나는 얼골빛 속에서 살고 움즈기는 것을 말없이 뭇사람에게 보이고 있었다. 『나는 世上(세상)에서 第一(제일) 幸福(행복)된 사람이외다』 하고 그는 말끝마다 感激(감격)에 넘치었었다.
이러한 믿음의 기쁨과 평화를 아무 꾸밈없이 노래한 것이 곧 이 「萬世磐石(만세반석)」의 詩(시)이니 이는 그가 愛蘭(애란)의 農村(농촌) 곡간 한모퉁이에서 回心(회심)의 經驗(경험)을 지낸 後(후) 二十年(12년)만인 一七七六年(1776년) 三月(3월)에 『世上(세상)에서 가장 거륵한 信徒(신도)들을 爲(위)한 삶과 죽엄의 祈禱(기도)』라는 題目(제목)으로 그가 主幹(주간)하는 雜誌(잡지) 『福音雜誌(복음잡지)』 誌上(지상)에 發表(발표)한 것이다.
이제 그 原文(원문)을 紹介(소개)한다면
Rock of Ages, Cleft for me, Let me hide meself in Thee;
Let the water and the blood, From Thy riven side which flowed,
Be of sin the double cure, Save me from its guilt and power.
Nor the labors of my hand, Can fulfill Thy law’s demands;
Could my zeal no respite know, Could my tears forever flow,
All for sin could not atone; Thou must save and Thou alone.
Nothing in my hand I bring; Simply to thy Cross I cling;
Naked, come to Thee for dress; Helpless, look to Thee for grace;
Foul; I to Thy fountain fly, Wash me Savior; or I die!
While I draw this fleeting hreath, When mine eye strings break in death,
When I soar to worlds unknown, See Thee on Thy judgment throne.
Rock of Ages, Cleft for me, Let me hide myself in Thee.
試譯(시역)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의지 합네다
鎗에傷한 옆으로 물과 피를 쏘친것[4]
내게 효험되어서 罪를 씨서 줍소서
내손으로 힘써도 律法成就 못하고
타오르는 熱情도 넘치는 눈물로도
罪贖할길 없으니 主여 救援합소서
뷘손으로 나아가 十字架만 붙잡네
벗은몸 입히소서 할수없는 罪人이
샘물 찾어가오니 主여 싳어줍소서
숨결있을 때에나 죽엄 오는때에나
딴世上에 가서나 審判자리 에서나
萬世磐石 열리니 내가 의지합네다
그는 肺病(폐병)에 걸리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자리에는 마치 저편나라로서의 榮光(영광) 빛이 넘처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내 靈魂(영혼)에 느껴지는 慰勞(위로)를 도모지 어떻다고 말할 수 없오, 말로 表現(표현)하기에는 너무 크오, 하나님의 慰勞(위로)가 어찌나 洽足(흡족)한지 나는 祈禱(기도)할 것이 없어졌오, 내 祈禱(기도)는 全部(전부) 讚頌(찬송)으로 化(화)해 버렸구려, 내 靈魂(영혼)은 벌써부터 天堂(천당)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오』 하고 그는 빛나는 낯으로 말하였다.
그의 떠날 時刻(시각)이 漸漸(점점) 가까워오며 脈搏(맥박)이 刻一刻(각일각)으로 弱(약)해질 때 그는 『하 이것이 내 죽음이 가까워 오는 표로구려, 그러나 내 心臟(심장)은 날마다 날마다 더욱 세차게 榮光(영광)을 向(향)하야 뛰고 있네, 나를 이렇게 말할 수 있게한 하나님께 讚頌(찬송)을 들이라』 하고 그는 똑똑히 말하였다.
바로 숨이 지기 前(전) 그는 기뿐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갈 때가 멀지 않었다. 하나님이 내 靈魂(영혼)에 나타내신 榮光(영광)을 世上(세상)사람으로서야 能(능)히 堪當(감당)할 者(자) 어듸 있겠느냐』
이리하야 그는 三八歲(38세)를 一期(일기)로 저나라에 옴기였다.
『Mhcn. I soar to the world unknown
See Thee on Thy judgment throne,
Rock of Ages, cleft for me!
Let me hide. myself in Thee』
『未知(미지)의 世界(세계)에 높이 올라서
審判(심판)의 寶座(보좌)우에 主(주)를 뵈올제
萬世磐石(만세반석)이여 저爲(위)해 열리사
主(주)안에 이몸을 감추게 하옵소서』- 直譯(직역)
이리하야 作者(작자)는 갔으나 이 노래의 餘韻(여운)은 世紀(세기)가 갈사록 더 깊이 더 넓게 쓰린 靈魂(영혼)들을 껴안어 주고 있다. 그 두어가지 實話(실화)를 쓰고 붓을 놓으려한다.
英國(영국) 웨일즈의 한 牧師(목사)가 自己(자기)의 回心談(회심담)을 이야기한 一節(일절)이다.
『나는 그때 한 兵士(병사)였다. 濛濛(몽몽)[5]한 戰塵(전진)[6]이 아직도 해를 어둡게 하는 어느날 그리미아 戰爭(전쟁) 알마의 大接戰(대접전)을 지낸 다음이였다. 우리 兵士(병사)들의 흘린 피가 너무 많아서 그 附近(부근)에 물은 먹을수 없는 까닭에 나는 물을 얻을려고 멀리 언덕 밑으로 찾어갔었다. 내 願(원)한바를 다 일운 後(후)에 나는 다시 野營所(야영소)로 발을 돌리였다. 여기 저기 늘어진 數(수)없이 많은 屍體(시체)를 넘어 거름을 옴기는 때 내눈에는 아비 잃은 孤兒(고아), 남편잃은 寡婦(과부), 늙은 어머니, 젊은 愛人(애인)의 痛哭(통곡)하는 樣(양)이 서언하게 보이며 鉛(연)덩이같이 무거운 氣分(기분)이 내리눌음을 느끼였다. 忽然(홀연)히 이 피비린내나는 空氣(공기)속에 기름 펴지듯 노래 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그 노래 소리를 따라갔다. 兵士(병사) 몇사람이 늙은 同僚(동료)들 가운데 놓고 熱心(열심)으로 노래 불르는 것이였다.
『萬世磐石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
『살어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저들이 이 마즈막節(절)을 노래한때 이 늙은 兵士(병사)는 눈을 들어 한울을 처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또 다시 불러주우」하였다. 저들의 다시불르는 노래가 채 끝나기 前(전)에 이 늙은 兵士(병사)는 흙으로 지은 허무러진 帳幕(장막)을 떠나 永遠(영원)한 本鄕(본향)으로 옴기여 갔다. 이 莊嚴(장엄)한 光景(광경)이 내 靈魂(영혼)에 다시 지우지 못할 그림을 남겨 놓아서 나는 救援(구원)의 길을 찾게되고 지금은 福音(복음)의 使者(사자)로 일하는 中(중)이다』
오래동안 放浪(방랑)과 無節制(무절제)로 人生(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젔던 한 親舊(친구)가 죽음이 눈 앞에 닥처오는때 어쩐지 本鄕(본향) 생각이 나서 故鄕(고향)의 옛 親舊(친구) 집으로 찾어 왔었다. 그의 옛 親舊(친구)는 있는 親切(친절)을 다하야 그를 欵待(관대)[7]하였다. 죽음이 오기 몇일前(전) 그리스도는 다시 이 蕩子(탕자)의 마음門(문)을 두르렸다. 主(주)는 이 거츨은 靈魂(영혼)의 터전에 座定(좌정)하섰다. 그가 죽기 數日前(수일전)에 그의 親舊(친구)가 『무엇에 所望(소망)을 붙이느냐』고 물은때 그는 讚頌歌(찬송가)를 달라고 손질하며 그 여위고 시달린 긴 손가락으로 讚頌歌(찬송가) 한 章(장)을 가르치며 『이것이 내 所望(소망)이오』 하였다. 그 찬송가는
『萬世磐石(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이였다.
이리하야 華麗(화려)한 宮殿(궁전)의 王者(왕자)의 입에서나 짓밟힐대로 짓밟힌 放浪兒(방랑아)의 입에서나 「萬世磐石(만세반석)」만이 讚頌(찬송)의 問題(문제)이였으니 이는 그이 만이 삶과 죽음을 通(통)하야 우리의 親舊(친구)가 되며 우리의 救援(구원)이 되는 까닭이다.
『우리 祖上(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그 구름과 바다에서 다 세례를 받고 모세에게 屬(속)하야 다 같은 신령한 량식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물을 마섰으니 이것은 저의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섰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니라』 - 고린도前書(전서) 11장 4절
- 六一六年(616년)
『십자군』 제1권 제3호, 1937. 9.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07~414.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7권, 262~270.
地中海(지중해)의 맑은 精氣(정기)가 뭉쳐 한 섬을 이루었다면 그것은 구부로[1] 일 것이다. 적은 섬이지만 高貴(고귀)한 存在(존재)이다. 고루시카[2] 島(도)가 殺伐(살벌)의 帝王(제왕) 나폴레온[3]의 生地(생지)래서 有名(유명)하다면 구부로는 「勸慰子(권위자)」인 바나바를 낳은 것만으로도 섬들의 王座(왕좌)를 占(점)할 것이다. 이 同情(동정)과 慰勞(위로)의 化身(화신)인 바나바의 古鄕(고향)에서 五百年後(5백년후)에 다시 施惠(시혜)의 聖者(성자) 요한[4]을 世上(세상)에 보낸 것은 하나님의 祝福(축복)이 連綿(연면)[5]하야 累千代(누천대)에 뻐침을 立證(입증)하는 한 史實(사실)로 볼수 있다.
聖(성)요한은 구부로섬 아마터스의 한 富家(부가)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의 前半生(전반생)의 記錄(기록)은 別(별)로 特記(특기)할 것이 없으나 언제나 豪放活大(호방활대)하야 大人(대인)의 氣風(기풍)이 있었던 것만은 事實(사실)이다. 그러나 幸(행)이랄가 不幸(불행)이랄가 사랑하는 妻(처)와 子女(자녀)가 뒤를 이어 世上(세상)을 떠나고 그는 累巨萬(누거만)[6]의 財産(재산)을 擁(옹)[7]한채 依支(의지)없는 혼자 몸으로 남기여졌다. 지금은 텡하니 뷘 高臺廣室(고대광실)이 도리혀 孤獨(고독)과 悲哀(비애)를 난화주는 한 廢墟(폐허)에 不過(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本來(본래)부터 믿음의 達者(달자)[8]이던 그는 이 運命(운명)의 戱弄(희롱)에서 大使命(대사명)을 빚어내지 않고는 마지 않었다.
『나는 지금부터 나의 조꼬마한 家屬(가속)을 爲(위)하야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食口(식구)들을 爲(위)하야 살 것이다』 하고 그는 奮然(분연)[9]히 집을 떠났다.
얼마 後(후)에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大主敎(대주교)로 被選(피선)되여 곧 任地(임지)에 나아갔다.
到任(도임)하자 그는 部下(부하)를 불러놓고
『여기 내 主人(주인)이 몇사람이나 되는지 調査(조사)해 올려라』 하고 下命(하명)하였다.
書記(서기)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하야 서로 얼골만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主(주)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섬기신 것 같이 내가 섬겨야할 가난한 兄弟(형제)들이 얼마나 되나 말이야』 하고 그는 깨우처 주었다.
아주 生計(생계)를 잃은 者(자) 七千五百名(칠천오백명)이라고 報告(보고)가 들어왔다. 그는 이때부터 각갓으로 이 貧民(빈민)들의 救濟(구제)에 盡力(진력)함과 同時(동시)에 돈푼이나 있노라고 奢侈逸樂(사치일락)[10]에 耽淪(탐륜)하야 하나님도 社會(사회)도 모르고 오직 自己(자기)배를 上(상)전으로 뫼시는 一部(일부) 有産者(유산자)들께 向(향)해서는 餘地(여지)없이 峻嚴(준엄)한 책망을 나리였다. 그 때문에 그에게는 숨은 適(적)이 무던히 많어졌다.
한 周日(주일)에 두 번씩 그는 會堂(회당)밖앝 마당에 自己椅子(자기의자)를 내다놓고 그 앞에는 긴 椅子(의자) 두엇식 놓은 다음에 終日(종일) 가난한 이 어려운 일 當(당)한 이들의 忌憚(기탄)없는 하소연을 들었다. 하로는 이 老聖者(노성자)가 밖앝 椅子(의자)에 나앉아 자꾸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웨 그렇게 落淚(낙루)[11]하십니까? 무슨 어려운 事情(사정)이 생기셨습니까?』 하고 書記(서기)는 惶恐(황공)한 낯으로 물어보았다.
『오늘은 한사람도 내게 도음 請(청)하는 이가 없구려!』 하는 것이 聖者(성자)의 對答(대답)이였다.
『다들 도음받을 必要(필요)가 없게 된 것이 겠읍지요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기뻐하십시요』 하는 書記(서기)의 慰安(위안)을 듣고서야 『그렇다면 좋으련만!』 하며 한울을 우러러 感謝(감사)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병원을 설립해놓고 여행하다가 병든 사람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러고 구제할 때면 남자에게 보담 여자에게 더 많이 주었었다한다. 그는 여자에게는 제손으로 살림해갈 힘이 더 부족하니까 더 도아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낮에 분칠하고 의복이나 별하게 차리고 와서 도와달라는 여자에게는 단돈 한푼도 주지 않으셨다.
거기 어떤 장사꾼이 있었는데 목선(木船)에 물건을 싯고 바다건너로 무역하려 다녔었는데 두 번이나 파선을 당하고 보니 아주 두손 털고 나앉게되여 낙심하고 한숨만 쉬며 지내는 것이였다. 이것을 안 聖者(성자)는 교회 소속의 목선에다가 밀을 가득 실어주며 이제 다시 한번 가보라고 말했다. 그 상인은 너무나 감사해서 백배 사례를 하고 다시 배에 돛을 달였다. 잔잔한 바다에 순풍을 만나니 배는 하로에 千里(천리)길을 날 듯이 건너간다. 그러나 거의 다 간 때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물결이 용솟음치며 배는 어딘지로 모르게 밀려가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재수 없음을 한탄하며 거저 죽은 줄만 알고 돛대에 매달려 밤낮을 지냈다. 얼마 지나서 다시 바닷물이 잔잔해진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는 무사히 영국 해안에 가 닿은 것이였다. 그때 그 지방은 흉년이 들어서 큰 야단난 때라 사람 살리라고 은이니 금이니 할 것 없이 있는대로 바치며 밀을 사갔었다. 몇일 후에 그는 은금을 한배 가득싯고 집에 돌아와 聖者(성자)의 축복을 감사하였다.
한번은 아주 못살게 된 귀족 한분이 이 聖者(성자)를 찾어왔다. 聖者(성자)는 자기 회계에게 금 一百五十(일백오십)원을 드리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회계는 암만 생각해 보아도 이 거지한테 그렇게 많은 돈 주는 것은 너무한다는 생각에서 五十(오십)원만 주어 보내였다. 바로 그 이튿날 잘살기로 유명한 부인신자 한 분이 구제비 五千(오천)원을 가져와서 이 聖者(성자)에게 들였다. 이 부인이 기전에 약속하기는 구제비로 만 五千(오천)원을 바치겠다고 했었는데 이제 五千(오천)원만 가져 온 것이 이상해서 聖者(성자)는 그 이유를 물었다.
『저 어젯밤에 一(일)만 五千(오천)원을 다 준비해 주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五千(오천)원만 있고 만원은 간데 없어요. 암만 야단을 치니 어디 찾을 수 있어야지요』 하고 그 부인은 미안한 낯으로 대답하는 것이였다.
聖者(성자)는 곧 이것이 하나님의 하신 일인줄 알고 회계를 불러서
『어저께 그 귀족에게 돈 얼마 드렸느냐?』 하고 물어 보았다. 회계는 무안해서 머리를 숙인채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聖者(성자)는 곧 사람을 보내어 그 귀족에게 물어 보았다.
『五十(오십)원을 감사히 받었습니다』 하는 회답을 손에 든 聖者(성자)는 한숨을 쉬며 탄식하였다.
『主(주)님께 심은 것은 主(주)께서 百(백)배나 갚아 주시마 하셨는데 어저께 五十(오십)원만 드렸으니 오늘 五千(오천)원만 주시는 것이로구나!』
그때 아푸리까의 재정권을 맡은 니케타스 長官(장관)은 이 교부의 너무나 풍부 재원(豐富한 財源)과 그 구제사업에 쓰는 것이 너무나 엄청나게 큰 돈임을 알고 한쪽으로 욕심도 나고 시기도 생겼다. 마츰 여러 가지 일로 해서 그 정부의 재정에 부족이 생겼다. 니케타스 長官(장관)은 기회가 좋다고 곧 이 교부의 재산을 徵發(징발)하야 그 缺損(결손)을 메꾸려하였다. 長官(장관)은 친히 몇 사람의 부하를 데리고 이 교구를 찾어왔다. 그리하야 지금 국고금이 부족하니 담방 금고를 갖다 바치라고 서슬이 프르러 야단 쳤다.
요한 교부는 금고를 가르치며
『여기 金庫(금고)가 있소. 그러나 그 돈은 교회 소유지 국고금은 아니오 당신이 억지로 가져가시려면 가져갈 수는 있겠지요마는 내 것이 아니니까 내가 줄 수는 없소』 하였다.
니케타스 長官(장관)은 곧 부하를 시켜 그 금고를 둘러 메워가지고 문밖에 나섰다. 마츰 그때에 사람들이 숫한 꿀통을 메고 들어오는 데 어느 통에나 「청신한 청밀」이란 표지가 붙어 있었다. 니케타스 長官(장관)은 요한 교부를 향하야
『나 저 꿀까지 뺏들어 갈가?』 하고 농담삼아 말하였다.
『얼마 가져 가십시오』 하고 교부는 곧 손소 몇통 갖다가 짐꾸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꿀통이 아니라 여러 교회 구역에서 연보한 돈 넣은 통들인데 가져오는 길에서 도적을 만날가봐서 「청밀」이란 표지를 부쳐 운반한 것이였다. 요한 교부는 이것으로 뺏긴 현금을 보충하야 사업이 거침없이 되여감을 감사하였다.
요한 교부는 이 짐꾸릴 때에 아래와 같은 글을 써넣었다.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으며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고 主(주)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은 진실하시고 거즛이 없으시다 우리 부유(蜉蝣)[12]같은 人生(인생)으로서 감히 영원하신 하나님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조심하야 잘가라』
그날 저녁 니케타스 長官(장관)은 식탁에 앉아서 낮에 가져온 꿀맞을 보려고 손소 짐을 풀었다. 그 속에서 나온 편지를 한참이나 읽더니
『그 교부가 인저 나하곤 단단히 틀렸어! 그 숫한 꿀통에서 요것 몇 개 주면서 이런 위협의 편지까지 쓴담!』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꿀통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꿀이 든 줄만 알았던 통속에는 번적거리는 금화(金貨)가 가득 담겨 있었다. 長官(장관)은 깜짝 놀라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상한 감동을 받은 長官(장관)은 그때야 자기가 교부에게서 금고를 뺏들어 온 것이 잘못인줄 절실히 느끼고 이튿날 금고와 꿀통에 든 돈까지 말금히 도로 보내며 사과하였다.
니케타스 長官(장관)과 요한 교부와는 이제부터 퍽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나 정부에서 가난한 사람들께 세금을 너무 과하게 받아서 어려운 사람들이 큰 걱정 났다는 것을 알고 교부는 언젠가 정부의 잘못을 통격(痛擊)한 일이 있었다. 돈많은 사람들 중에서 전부터 요한교부를 아니꼽게 역이던 몇 사람이 곧 니케타스 長官(장관)께 가서 요한 교부가 빈민들을 선동해 가지고 정부에 반항(反抗)한다고 몹시 불커서 중상(中傷)하였다. 니케타스 長官(장관)은 잔뜩 골이나서 불이나게 교부를 찾어와 있는 욕은 다 퍼붓고 돌아갔다. 요한 교부는 좀 마음이 언쨘어서 그날을 불쾌하게 지냈으나 해질녁에 그는 편지 한 장을 써서 니케타스 長官(장관)에게 보냈다.
『지금 해가 져갑니다』
이것이 그 편지 내용의 전부였었다. 이런 이상한 편지 받은 長官(장관)은 얼마동안 묵묵히 생각하다가 마츰내 에베소 四(4)장 二十六(26)절에 있는 『분을 내여도 죄를 범하지 말고 해지도록 분을 품지마라』 한 성경말삼에서 나온 것을 알고 곳 자기의 경솔을 후회하고 다시 요한 교부와 친하게 지냈다.
한번은 서긔 두사람이 서로 싸와서 주먹질까지 하였음으로 교부는 두 사람을 다 함께 얼마동안 책벌했었다. 그중 한사람은 자기 잘못을 깨닫고 책벌을 달게 받었으나 한 사람은 요한 교부를 원망하며 교회에도 나오지 않게 되였다. 다음 주일 예배시간이 되어 집사(助祭)[13]가 장막을 거두고 성긔(聖器) 덮은 보를 버끼는 순간 요한 교부는 문득 마태 5장 23-24의 말씀 『예물을 제단에 들이려고 거기 잇을 때에 네 형제가 너를 인하야 원망하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몬저[14]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들이라』한 것이 생각낫던 것이다. 그는 집사를 식혀 교인들과 함께 보통 기도문을 읽게 하고 자기는 교부실에 들어가 곳 사람을 식혀서 자기를 원망하는 서긔를 불러왔다. 그 사람이 들어오자 요한 교부는 곳 이러나 그의 발앞에 꿀어업데여 공손히 절하며 『내 형제여 용서하시오!』 하였다. 이 금빛 찬란한 법복 입은 대주교께서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땅에 대여 절할 때 이 죄지은 서기는 어쩔줄 몰라 콱 주저앉으며 엉엉 울었다 한다. 그러고 천만 용서를 빌었다. 교부는 그를 껴안아 이르켜 눈물을 씻어 준 다음에 그 길로 회당에 들어가 다시 예배를 계속하였다.
어떤 귀족 한분은 자기하고 의견틀린 사람 하나와 서로 원수가 되여 아모리 용서하래도 한사하고 듣지 않았었다. 하로는 요한 교부께서 이 귀족을 일부러 청해다가 바루 제단 앞에 안치고 예배를 들이기 시작하였다.
요한 교부는 전회중을 향하야
『우리 다같이 주기도문을 외입시다』 하고 음성을 높여 주기도를 인도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데까지 외인 다음에 딱 멈추어 버렸다. 일반 교인들도 인도 하는 이가 멈추니 다들 따라 멈추었다. 그러나 바로 제단 밑에 앉은 이 귀족은 너무 가까이 앉은 까닭에 그런 눈치를 차리지 못하고 그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야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야 주옵소서』 하고 크다란 목소리로 다음 구절을 혼자 외여 버렸다. 그러고는 좀 무안해 하면서 자기도 따라 멈추었다. 그때 요한 교부는 장엄한 태도로 그 귀족에게 가서 『인재 무어라고 기도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귀족은 마치 창에 찔린 것 같이 양심에 찔림을 받어 그 길로 나가 그 사람을 찾어 모든 잘못을 사과하였다.
교인들의 몇 사람은 예배 볼적에 성경랑독이 끗나면 곳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서는 예배 필할 때까지 저이끼리 잠담(雜談)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어느 주일날 예배보는 중에 또 그 사람들이 슬그머니 나가는 것을 보고 요한 교부는 예배를 중지하고 뚜벅뚜벅 걸어서 밖으로 나가더니 그 사람들이 돌려 앉어 한창 이야기하는 틈에 끼여 앉으며
『양떼 있는 곳에 목자도 있어야지!』 하고 슬그머니 웃으섰다. 그 사람들은 너무 부끄럽고 황송해서 낯을 가리우고 예배당으로 뛰여들어갔다. 그후부터는 그런 버릇이 아주 없어젔다.
이 聖者(성자)는 알렉산드리아 市(시)의 빈민촌에다가 조고막식한 집을 숫해짓고 그 안에 침대와 침구를 가추어서 집없는 사람들이 거긔서 자게 하였다. 하로는 그가 교부 트로일러스와 함께 이 빈민촌 심방을 떠났다. 그때 이 트로일러스 교부는 어느 은방에 있는 아주 유표한 은잔 하나가 어찌도 마음에 들었던지 그것을 사려고 금 三百圓(삼백원)을 꽁꽁묵거 주머니에 너어 가지고 다니는 중이였다. 정작 이 빈민굴에 가보니 죽게된 사람이 어찌도 많은지 참아 거저 지날 수가 없었다. 聖者(성자) 요한은 트 교부의 주머니 속에 돈 얼마 있는 줄을 잘 알고 있는 터이라
『여보게 자네 주머니에는 돈이 적잔히 들어있는 모양이네 그려 아마도 한 三百圓(삼백원) 되는 것 같은데 그걸 좀 헛처서 이 불상한 사람들을 살리게 그려!』 하였다.
트 교부는 감히 못하겠다고도 못하고 한참 망사리다가 할수 없이 그 돈 뭉치를 끄집어 내여 떨리는 손으로 이 사람 저 사람 난화주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아까워서 가슴이 막 타오르는 것 같었다.
그때붙어 그는 머리 앞으네 하고 골을 싸맨채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끙끙알코 있었다. 聖(성) 요한은 그가 왜 알는다는 것을 대강 짐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좀 자세히 알어보려는 술책으로 사람을 보내여
『어늘 저녁 우리 집에 와서 저녘 같이 나누십시다』 하고 만찬에 청하였다.
『나 병 때문에 갈 수 없소』 하는 것이 트 교부의 회답이었다. 聖(성) 요한은 곧 돈 三百圓(삼백원)을 주머니에 너허 가지고 트 교부를 찾어갔다. 병위문이 끝난 다음에 그는 아주 천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돈 三百圓(삼백원)을 꺼내 노흐며
『참, 빈민촌으로 같이 갔었을 때 내가 자네 돈 三百圓(삼백원) 쓴 일이 있었지! 요새 몸도 고단하고 퍽 어렵게 지냈을터인데 늦어서 안됐네』 하고 아무러찮게 이야기하였다.
이 돈 三百圓(삼백원)이 상우에 노히자마자 트 교부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아 괜찮습니다. 뭘 인저 원긔 왕성합니다』 하면서 툭툭털고 이러났다.
『그럼 병이 나았으면 지금 우리집에 가서 저녁이나 난웁시다. 그려!』 하고 聖(성) 요한은 그를 데리고 집에 와서 만찬을 잔뜩 대접하였다. 그새 속이 타서 밥도 잘못먹고 알턴 트 교부도 지금은 마음이 탁 풀리며 저녁도 긔끈 먹었다. 그대신 식후에는 식곤증이 나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꿈에 그는 그야말로 긔화요초 향긔로운 동산 속에 갔었는데 거긔 썩 아름다운 집이 있고 그 문패에는 「주교 트로일러스의 영원한 안식처」라고 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너무나 조하서 입이 벌신 벌신해 처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있노라니 힌 옷을 입은 무리가 몰려와서 그전 문패를 떼여버리고 「대주교 요한이 금 三百圓(삼백원)으로 산 그의 영원한 안식처」라는 문패를 가러부치고 가버리였다. 잠이 깬 다음에 그는 머리를 숙이고 깊히 생각하며 집으로 도라갔다.
집 일꾼들 중에 한사람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만 닥쳐와서 늘 요한 교부에게 신세지고 살어왔었다. 그럼으로 그는 하로 일부러 찾어 와서
『주교님 은헤는 백골란망입니다. 어떠커면 이 은헤의 만분지일인덜 갑흘수 있겠습니까?』 하며 절하였다. 聖(성) 요한은 그 사람을 이르키며
『아니다. 이 못난 요한은 아직도 너이를 위하야 피흘리지 못했다. 감사가 다 무어냐?』 하며 진심으로 미안해 하섰다.
그 지방에 데오펜더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일생을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로 지내였다. 재산은 전부 구제사업에 써 버리고 남은 것은 오직 어린 자식 하나뿐이였다. 그는 세상 떠날 때 그 어린 자식을 불러놓고 돈 百圓(백원)을 내노흐며 『여기 남은 돈이라곤 百圓(백원)밖에 없다. 이걸 네게 물려주랴? 주님께 드리랴?』 하고 물었다.
『主(주)님께 드립시다』 하고 어린이는 똑똑히 대답하였다.
『내 아들아 그럼 가지고 나가서 가난한 형제들께 난화 드려라』 하고 운명하셨다. 이 의인의 자식이 의지가지[15] 없게 되였다는 소문을 들은 聖(성) 요한은 곳 그 아이를 다려오고 싶었섰으나 서틀게 서둘가다는 혹 그 결벽(潔癖)한 어린이의 자존심(自尊心)을 상할가 염녀하야 그는 자긔 서긔를 식혀 거짓 족보를 꿈여서 대주교 요한은 그애 부친하고 사촌간이라는 것을 간접으로 알게한 다음에 사람을 보내어 그애를 다려오게 하였다.
이 소년이 문안에 들어서자 聖(성) 요한은 달려나가 부듸켜 안고 입맛초며
『이게 왼 일이냐? 내 사랑하는 동생의 아들이 이럴변이 어듸 있니!』 하고 집안에 안어들이다 싶이하야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리하야 그 아이를 거기서 길러 장가들여 가산을 난화 주어 걱정 없이 살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私生活(사생활)은 참으로 검박하였다. 검박이라는 것 보담 비참하다고 말할 지경이였다. 그의 침상에는 다 구멍뚤린 모전 한 벌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리 어떤 귀족이 이 형편을 알고서 훌륭한 새 모전을 사 보내였다. 그는 하롯밤을 덮어보고 곳 팔어서 구제비로 써 버렸다. 그런줄을 안 귀족은 또 다시 사보냈다. 그는 그것을 또 팔어서 구제비로 썼다. 이렇게 사보내고 팔고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나 하여간 내종에 이 성자는 웃으며
『어듸 사보내는 사람이 못견듸나 팔어먹는 사람이 못견듸나 내기해 봅시다』 하고 말슴하섰다.
이런 이야기를 쓰랴면 끗이 없다. 하로는 니케타스 長官(장관)이 황제 폐하께 보고해서 황제 폐하께서 특히 이 성자를 청하신다고 소식이 왔다.
그리하야 니케타스 長官(장관)은 친히 자긔가 콘스탄치노플까지 함께 갈터이니 긔허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것이였다. 聖(성) 요한은 그러면 가 뵙자고 둘이서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 一行(일행)이 로데스에 이르렀을 때 이 성자에게는 하날로서의 묵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니케타스 長官(장관)을 향하야 『당신은 지금 나를 세상 인군께로 다려가려는 터이지만 지금 하날 인군께서 나를 불르시는 구려』 하면서 동행하는 니케타스에게 작별하였다. 그러고 배를 타고 자긔 고향인 구부로 섬에 들어가 그가 처자와 함께 전반생을 보낸 아만터의 엿집에 다닫자 곧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 享年(향년) 六十四歲(육십사세) 알렉산드리아 大主敎(대주교)로 奉職(봉직)한지 七年(칠년)만이었다.
[史料(사료)] 구브로의 監督(감독) 레온티어스의 편즙한 그의 傳記(전기). 原材料(원재료)는 요한 主敎(주교)와 함께 일하던 神父(신부)들이 收錄(수록)한 것이다.
- 約(약) 五七○年頃(570년경)
『십자군』 제1권 제5호, 1937. 12.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01~406.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7권, 254~261.
푸랭크(佛國)[1]의 王(왕)들은 그 궁궐 안에 風流客(풍류객)들을 모아 특별한 대접을 하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노래하고 詩(시) 짓는 수많은 才子(재자)[2]들이 구름같이 모인 중에서도 그때 특별한 사랑을 한몸에 모인이는 英國(영국)의 젊은 彈詠(탄영) 詩人(시인) 「히바니온」이였다. 이 젊은이는 일찍 聖(성) 카독의 門下(문하)에서 修學(수학)한 일이 있음으로 「小聖者(소성자)」라는 別號(별호)를 가지고 있었으며 少時(소시)부터 極(극)히 英敏(영민)하여 才氣喚發(재기환발)[3]한 詩魂(시혼)의 所有者(소유자)였다. 하로는 聖(성) 카독이 이 「小聖者(소성자)」의 才氣(재기)를 試驗(시험)하기 爲(위)하여 人格(인격)을 빛나게 하는 열여덟가지 美德(미덕)을 죽내리 외인 다음에 그대로 외여보라 하였다.
『試鍊(시련)에 强(강)하며 苦難(고난)에 참으며 行事(행사)에 活潑(활발)하고 榮譽(영예)에 尊節(존절)하며 事爲(사위)에 謙卑(겸비)하여 善行(선행)에는 堅持(견지)[4]하고 勞役(노역)에는 꾸준하며 敎訓(교훈)에 부지런하고 言思行(언행사)에 情(정)답게하며 紛爭(분쟁)에는 和平(화평)을, 溫恭(온공)[5]하여 禮儀(예의)를 직히고 집에 있으매 和睦(화목)하며 隣人(인인)[6]을 對(대)하매 理解性(이해성) 있고 마음과 몸은 깨끗하게, 말과 行實(행실)은 바르게 道德生活(도덕생활)에는 謹嚴(근엄)하고 무엇보다도 因苦(인고)한 이에게 親切(친절)하라』
『썩 잘 외였다. 너 나보다 더 잘 외이는구나!』 하고 聖(성) 카독이 칭찬하매 이 「小聖者(소성자)」는 『아니올시다. 先生(선생)님, 저는 先生(선생)님보다도 더 낳게 외여보려고 애썼는데 先生(선생)님은 저보다 못하시노라고 말슴하시니 저는 교만하고 선생님은 겸손하십니다. 賞(상)은 先生(선생)님께로 돌립니다.』 하고 即席(즉석)에서 應答(응답)하였다 한다. 그 才氣(재기)를 可(가)히 짐작할 좋은 例中(예중)의 하나이다.
五一三年(513년)으로 五一七年(517년)까지 四年(4년)동안 그는 푸랭크의 王(왕) 킬데버트[7]의 宮庭(궁전)에서 가진 寵愛(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지내였으나 차츰 故國山川(고국산천)이 그리워지며 때때로 憂愁(우수)에 잠기는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王(왕)께 하직하고 英國(영국)으로 도라갈 배를 타려고 佛國(불국)의 南端(남단) 뿌리타니에 나려갔다.
배 기다리는 동안 그는 그 地方(지방)의 임군(諸侯[제후])의 宮中(궁중)에 留(유)하며 사랑을 받아 오던 中(중) 하로는 임군과 함께 산양을 떠났다. 따스한 봄날, 山河(산하)는 바야흐로 그 明朗(명랑)을 자랑하는 때였다. 그의 輕快(경쾌)한 말발굽은 내를 건너 山(산)넘어 깊은 숲속으로 밟아들었다. 때에 난데 없는 甘美(감미)한 노래소리가 숲 사이로 숨여들린다. 그의 마음은 유달리 보드러워졌다. 그는 노래소리를 더듬어 상수리나무의 푸른 잎사귀를 헤치면서 마츰내 向陽(향양)[8]한 언덕으로 나왔다. 芳年(방년)의 아름다운 處女(처녀) 하나 시냇가에 몸을 구펴 봄풀을 깨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냇가에
적은 紅彩花(홍채화)
그래도 다들
적은 女王(여왕)이라
불러 준다네』
「小聖者(소성자)」 히바니온은 가까히 나가며
『나는 당신께 人事(인사)들입니다.
봄날의 女王(여왕)이여
당신의 낯은 어찌 그리 純白(순백)하십니까?
당신의 노래는 어찌 그리 맑으십니까?
자 이제 말슴해 주십시오.
당신은 지금 무슨 꽃을 꺾으시는지요!』
하고 첫 말을 거니였다.
『나는 꽃을 꺾지 않습니다.
이이들(꽃을 가르침)은 다 純潔(순결)하옵니다.
이풀은 悲哀(비애)를 쪼차냅니다.
저꽃은 盲目(맹목)을 물리칩니다.
그러고 나는 지금
죽엄에 물들지 않은
生命(생명)의 풀을 찾아 다닙니다.』
이렇게 노래를 주고받는 동안에 임군은 이리로 찾아왔다. 샘물가에서 꽃과 함께 자라난 處女(처녀)와 젊은 詩人(시인)의 마주친 마음을 아는 임군은 곧 親(친)히 중매인이 되어 未久(미구)[9]에 宮中(궁중)에서 盛大(성대)한 結婚式(결혼식)이 열리였다. 그는 故國(고국) 생각도 잊어버리고 꿈속같이 몇해를 지내였다.
이렇게 三年(3년)을 지낸 때 그들에게는 첫아들이 誕生(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애기는 눈먼 애기였다. 이것이 처음 맛보는 世上(세상)의 쓴잔이다. 일홈을 「허-베」(쓰다)[10]라고 지어 주었다. 搖籃(요람)속에 애기는 날마다 애처럽게 울기만 한다. 어머니의 노래 아니고는 그 울음을 끄치게 할 道理(도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搖籃(요람) 옆에서 노래불러 이 어린 魂(혼)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이리하여 「어린 허-베」는 나면서부터 노래와 詩(시)속에서 자라났다.
이 애기 두 살 된 때 아버지 「히바니온」은 世上(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本來(본래) 山間(산간)에서 孤兒(고아)로 자라난 몸이라 인저 의지가지[11] 없는 혈혈단신이 되었다. 어머니의 쓰린 눈물을 먹으며 이 애기는 그래도 자라고 자라 일곱 살이 되였다.
철차린 어린 「허-베」는 어머니의 因苦(인고)를 조금이라도 덜려는 孝誠(효성)으로 흰개(白狗)[12]에게 줄을 매어 그 줄을 쥐고 거리로 나가 날마다 노래로 밥을 빌었다. 이 情景(정경)을 노래한 뿌리톤의 民謠(민요)
『둘 같이 굳은 건 사람의 心情(심정)인가
일곱 살 장님아이 흰개를 딸아
추어서 이 쪼으며 노래 불르는
그 情狀(정상)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心情(심정)이란 돌같이 굳은 건가』
「靈魂(영혼)의 노래」라는 뿌리톤의 民謠(민요)는 이 눈먼 「허-베」가 千聖祭(천성제)날 黃昏(황혼)에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는 그 지은 노래를 불르며 집으로 오는 길에 춥고 疲因(피인)하여 길바닥에 거꾸러저 앞 이빨을 꺾고 피 먹은 입으로 어머니께 도라왔다고 한다.
이렇게 또 七年(7년)을 지나 허-베가 十四歲(14세)된 때 그는 어머니 앞에 꿀어앉아 새 決心(결심)을 엿주었다.
『어머니 저 벌써 七年(7년) 남어 빌며 도라다니지만 所得(소득)이 무어 있습니까? 人心(인심)은 薄(박)하고 時節(시절)은 나뿌고, 어머니 나 인저 어느 閑寂(한적)한 곳에 가서 하나님 찬송하는 노래나 불르며 지내고 싶어요.』
어머니 「리바논」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그 길로 흰개를 동무삼아 隱者(은자) 꼬어포에드의 草幕(초막)으로 허-베를 보내고 自己(자기)는 어느 女子修道院(여자수도원)을 찾아 가서 몸을 依託(의탁)하였다.
이리하여 허-베는 「꼬어포에드」의 草幕(초막)에서 거룩한 隱者(은자)와 함께 留(유)하며 그 附近(부근) 아이들과 함께 이 隱者(은자)에게서 글을 배워 卓越(탁월)한 才質(재질)을 드러내었다.
七年後(7년후), 허-베는 어머니를 뵙고저 隱者(은자)와 함께 女子修道院(여자수도원)으로 찾아갔다. 「샘물가의 적은 女王(여왕)」 薄命(박명)한 어머니는 눈먼 외아들에게 最後(최후)의 祝福(축복)을 남기고 數日後(수일후)에 世上(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여인 허-베는 노래 부르며 다시 草幕(초막)으로 더듬어 들었다. 그러나 그때 그 草幕(초막)의 主人(주인)인 隱者(은자) 꼬어포에드는 修道(수도)하기 爲(위)하여 더 깊은 山(산)속으로 들어가고 그 草幕(초막)을 허-베에게 맡기였다. 허-베는 여기서 隣近(인근) 아이들과 함께 글 읽고 노래 가르치며 즐겁게 지내였다. 아이들은 이 눈먼 先生(선생)을 극진히 따랐다. 그는 音樂(음악)과 詩(시)와 宗敎的(종교적) 道德的(도덕적) 格言(격언)을 가르쳐 주는 것이였다.
그가 가르친 아이들 工課(공과)의 一節(일절)
『이리오너라 아이들아. 새 공과를 배우자 아침에 이러나거던 선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라. 「내 하나님이여 오늘도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맡으시옵소서」 언제든지 햇님처럼 하늘에서 너이들을 나려다 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해라. 산속에 들장미를 꽃피게하는 햇님처럼 너이를 길르는 하나님을 생각해라. 밤에 잠자리에 눕기 전에 다시 한번 기도해라. 「흰 천사님 오셔서 새벽까지 날개안에 품어 잘자게 하옵소서」 하고. 이것이 믿는 아이의 할 일이니라. 그러고 늘 내 가르친 노래를 불러라』
세월 감을 따라 믿음과 德行(덕행)이 圓熟(원숙)하니 그를 따르는 弟子(제자)가 많은지라 東方(동방)으로 옮겨가서 한 修道院(수도원)을 짓고 弟子(제자)들을 訓練(훈련)하였다. 그러고 때때로는 그의 족하딸 크리스틴이란 少女(소녀)에게 이끌리여 거문고를 손에 들고 「뿌리타니」[13] 地方(지방)의 方方谷谷(방방곡곡)을 도라다니며 노래하고 가르치고 위로하였었다.
이 크리스틴이란 少女(소녀)도 亦是(역시) 孤兒(고아)로서 허-베의 어머니가 거두어 길르다가 그가 世上(세상)떠난 後(후)에 허-베를 따라온 可憐(가련)한 少女(소녀)였었다. 이 귀여운 少女(소녀)를 위하여 修道院(수도원) 兄弟(형제)들은 敎會堂(교회당) 가까히 못가 수양버드나무 밑에 꿀버리집 같은 한 적은 집을 지어 주었다. 土(토)요일날이면 이 少女(소녀)는 마치 꿀버리같이 이 적은 집에서 뛰여 나와 꿀버리같이 노래 불르며 草場(초장)으로 못가로 곻은 꽃 푸른 풀을 모아다 祭壇(제단)을 꾸미였다.
敎堂(교당)에서 제단 꾸미는 동안에도 그의 입에서는 노래가 끊을새 없었다. 늙은 盲聖者(맹성자)는 이 노래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끔 몰래 敎堂(교당) 창문을 열고 슬그머니 엿듣다가도 크리스틴에게 들켜서 『아저씨 나한테 들켰어요!』 하면 빙그레 웃으며 물러가곤 하였다 한다.
그때 뿌리타니의 임군은 몹시 無道(무도)하고 포악하여 罪(죄)없는 백성을 함부로 죽이고 民財(민재)[14]를 약탈하여 모두를 못살게 맨드는지라 그대로 둘수 없어 監督(감독)들이 「런부리아」 岩窟(암굴)속에 모여서 大會(대회)를 열고 이 暴君(폭군)에게 黜敎(출교)를 선언하려 하였다.
그때 허-베도 請(청)함을 받았었으나 좀 늦게야 오게 되었으므로 거기 있는 監督(감독)들 中(중)에서 어느 한 사람은
『그 까짓 눈먹장이 거지를 기대릴건 무어냐?』
하고 골을 내며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허-베는 少女(소녀) 크리스틴의 손을 잡고 그 岩窟(암굴) 문앞에 나타났다. 헌 山羊(산양)의 가죽을 몸에 둘르고 맨발에 지팽이 짚은 진실로 「눈먹장이 거지」 行色(행색)이였다.
그는 바로 전에 자기를 욕하던 감독을 向(향)하여 나즈막한 소리로
『내 兄弟(형제)여! 내 눈먼 것을 능욕하는가? 내 눈은 어둡게 하시고 兄弟(형제)의 눈은 밝게 하신 것이 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된 것인데!』
하고 은근히 꾸짖었다 한다.
이 임군에게 黜敎(출교)를 선언하기로 작정되매 거기 모인 감독과 僧侶(승려)들은 촉불을 켜들고 둘러서서 허-베에게 그 宣告文(선고문)을 읽게 하였다. 허-베는 바위우에 올라서서 그 출교선고문을 읽었다. 돌아섰던 일곱 監督(감독)이 세 번 「아-멘」하고 외치자 會衆(회중)은 一齊(일제)히 켜들었던 촉불을 땅바닥에 던져 발로 짓밟아 불을 꺼버렸다.
인제 이 民謠(민요)의 늙은 聖者(성자)는 떠날 날이 가까웠다. 聖者(성자)는 적은 크리스틴에게 말하였다.
『내 족하 티나야
내 寢床(침상)을 예비하라.
저 제단앞 내 主(주)님 발아래
단단한 땅바닥에
내 침상을 예비하라.
돌을 갔다 벼개 삼고
내 몸엔 재를 뿔여
검은 天使(천사) 찾거들랑
재 우에 있다 말하라.
내 심장은 약하다.
내 힘은 다하였다.
마즈막이 가까워온다.』
적은 크리스틴은 울음이 터졌다.
『내 아저씨!
아저씨 심장이 약해 진다면
내 심장은 멈춥니다.
내 아저씨!
아저씨께서 나를 사랑하시거던
하나님께 청들어
뾰-트(小艇[소정])[15]가 큰 배를
따라게 「합소서』
『티나! 내족하 내 姉妹(자매)야!
하나님이 심으시고
하나님이 거두시거니
하나님만이 主人(주인)이란다』
이리하여 이 盲聖者(맹성자)는 監督(감독)들과 僧侶(승려)들과 弟子(제자)들이 둘러앉은 가운데에서 病(병)든지 사흘만에 그 거륵하고 多恨(다한)[16]한 靈魂(영혼)을 창조주의 품안으로 내쉬였다. 그 瞬間(순간) 少女(소녀) 크리스틴은 두 팔로 늙은 아저씨의 두발을 부둥켜 안은채 다시 일지 않았다. 그리하여 적은 뾰-트는 큰 배를 따라 저쪽 港口(항구)로 옮기였다.
그의 遺骸(유해)는 佛國(불국) 革命(혁명)때에 없어졌으나 그의 자라난 搖籃(요람), 多情多恨(다정다한)[17]한 숲속의 女王(여왕) 그 어머니의 눈물로 적신 搖籃(요람)은 아직도 그때의 자장가를 담은채 「한하반」 敎會堂(교회당)안에 놓여 있다.
史料(사료)! 알버트, 리 그란드 著(저) 그의 傳記(전기). 流行民謠(유행민요)와 傳說(전설)이 多分(다분)으로 揷入(삽입)되였다.
한국기독교연합회 제12회 총회 총대제위께 고함 이 문서는 한국기독교연합회(N.C.C) 제12회 총회 당시 기독교장로회(기장) 대표들이 총대들에게 전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담고 있다. 기장 측은 예수교장로회(예장)와의 분열 이후 회원권 행사 과정에서 겪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