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8-15] 하늘 나라는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 1998년 12월 6일, 김상근 목사

9월 20, 2026

하늘 나라는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마태복음 20장 8-15절 / 이화여대 대학교회


[회상 노트]

선거에 의한, 민주적인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기쁨은 잠시였다.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획기적인 조처들이 감행되었다. 부실화한 은행과 기업들을 퇴출시킨다. 모든 기업이 이른바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다름 아닌 집단 퇴직이다.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이게 뭔가?

민주적 정부,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정권은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감싸 주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권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을 더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지금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이루는 데 표를 보탰을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과연 무엇이었나? 지금은 또 어떤 힘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힘은 너무 크고 절대적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반동의 힘이다. 어찌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올 수 없다. 예수께서도 전혀 불가능한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우리가 그것을 포기하고 세계의 반동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세계의 반동성과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명을 다짐하고 싶었다.

교회는 현실 정치를 훈수해서는 안 된다. 정도(正道)를 설교할 뿐이다. 다른 가치를 선포할 뿐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치인은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현해 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 교회는 현실을 모르는 소리, 그러나 바른 예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다. 나는 그때 이런 보수주의자였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는 바야흐로 20세기의 종착점에 이르러 있다. 그리고 계절로 보면 예수 오심의 의미를 다시 새기고 우리를 고쳐 세우는 대강절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다. 지난 몇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격동의 복판에 있다. 이 변화, 이 격동의 진실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의 목표점, 혹은 끝점은 과연 하나님의 나라일까?

도대체 20세기란 인류에게 무엇이었나? 인류에게 무엇이었던가라고 표현했지만 이런 식의 자문은 진실을 추상화시킬 위험이 있다. ‘나에게, 우리 민족에게, 가진 자인 나에게, 못 가진 자인 나에게 무엇이었느냐’고 자문해야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전체를 놓고 보면 정의를 향해 발전한 한세기였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강대국의 반동이 있었다. 전반기에는 무력으로, 후반기에는 이데올로기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다스렸다. 각각 명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피지배국의 자리에서 보면 그것은 부정의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우리는 20세기 전반기를 식민지로, 후반기를 민족 분단으로 고통을 강요당했고 지금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파쇼주의의 퇴치나 반공이라는 명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서 죽임을 당한 개인이 얼마며, 그들에게 그것을 최고선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강대국들의 세계 지배의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반동이었다. 여기서 인권의 문제가 대두되게 되었던 것이다.

무력의 지배도, 이데올로기의 지배도 반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것은 역사의 발전이다. 하나님께서 지배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의 행사요 하나님의 구원사다. 인간의 반동을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이다.

지금 세계는 무력의 시대가 아니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 세계를 갑자기 지배하고 있는 철학은 ‘신자유주의’다. 그 수단은 세계화며 자유 시장경제며 국제 경쟁력이며 무한 경쟁이다. 이것들은 신자유주의의 규칙들이다

모든 조직은 경쟁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품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품질 향상으로만은 부족하다. 원가를 절감해야 한다. 그래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능이 뒤지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생산성 제고를 위해서 퇴출을 강요받게 된

다. 이러한 강압에서 비켜설 수 있는 조직은 없다. 말하자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이 파도에 휩쓸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20세기의 전쟁 그리고 이데올로기 갈등 속으로 모두가 내몰렸던 것과 같다.

어떻게 하면 모든 조직이 다같이 승리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기업, 각각의 기업이 똑같이 인원을 감축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그래서 좋은 상품을 만들어 내면, 그 모든 기업이 다같이 승리하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른바 win-win이 될 수 있는가?

무한 경쟁은 win-win을 보장하지 않는다. 모두의 승리를 끌어내 주는 룰이 아니다. 모두의 이김이 아니라 모두의 패배가 예약되어 있다. 설령 지금 경쟁에서 이겼다 하더라도 이긴 순간, 다음의 경쟁을 위해서 다시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다시 구조 조정에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개인과 개인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경쟁이 강요된다. 개인의 인격이나 가정의 보존이나 사회의 안정 따위는 고려되지 못한다. 퇴출당한 사람,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질은 심각하게 훼손당한다. 실직자의 자리에서 그 고통을 생각해 보라. 그 가정을 생각해 보라. 노숙자의 처지는 또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20세기의 끝점, 21세기의 초입에 선 우리는 이 불행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나마 명맥을 이어온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 다른 차원의 인권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20세기 전반, 전쟁의 명분은 반파쇼였다. 그로부터의 인류의 해방이었다. 20세기 후반, 이데올로기 갈등의 명분은 반공, 혹은 반제였다. 그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지금의 세계화의 명분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의 종착점은 무엇인가? 무슨 해방인가? 해방이라는 명분을 타고 강대국들이 세계 지배 구조를 만들어 낸 그 반동은 없는 것인가?

얼마 전만 해도 ‘20:80의 사회’라는 개념은 지구 자원의 80%를  20%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반대로 80%의 사람들은 지구 자원의 겨우 20%로 살아가고 있다는 부정의를 고발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오게 될 것이라는 ‘20:80의 사회’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오직 20%의 사람들만이 일자리를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고,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실업자로 전락하게 된다는 뜻이다. 앞으로의 사회는 20%의 자기 실현 그룹과 그들에게 종속되는 80%의 종속군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세계는 이렇게 가고 있다.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철학은 과연 정당한가? 자본주의의 세계화, 자유 시장경제, 무한 경쟁이라는 가치관은 정당한가? 우리가 갈망하는 하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것인가? 예수께 묻자. 하늘 나라는 무엇인가? 하늘 나라를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세계화 등이 하늘 나라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무어라고 대답하시는가?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하신다. 하늘 나라는 이러이러한 포도원 주인과 같다. 포도원 주인의 철학, 가치관과 실천이 있는 것이 하늘 나라와 같다는 말씀이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다.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일꾼들과 합의하고 자기 포도원으로 보낸다. 9시에 다시 나가서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그들에게도 자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한다. 12시와 오후 3시에도 그렇게 한다. 오후 5시에 나가 본다. 역시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 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답이다. 주인은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라고 포도원으로 보낸다. 저녁이 되었다. 주인은 관리인에게 임금 지불을 지시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맨 처음에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라 한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 맨 처음에 온 사람들은 자기들은 좀더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지금 예수의 이 가르침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주제는 ‘하늘 나라’다. 하늘 나라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다. ‘하늘 나라는 위의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것이 예수의 설명이다.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하늘 나라는 위에 말씀하신 사회와 같다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 이루어 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원 고용이다. 전원 고용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늘 나라와 같다는 것이다. 근사치적 하늘 나라다. 능력 있는 사람만 일하게 되는 사회가 아니다. 일은 자기 실현의 기회다. 이 기회가 누구에게는 주어지고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다. 전원 고용이다.

포도원 주인의 특징적 행위는 공평한 생활급의 실현이다. 이것이 근사치적 하늘 나라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른 아침에 온 사람과 오후 5시부터 일한 사람 사이에 임금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에 익숙한, 경쟁에 익숙한 우리는 이런 상식에 이의를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하루의 생활비만큼 똑같이 나누어 준다.

포도원 주인의 의도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의 보장이다. 모두가 함께 일하고 그것을 함께 기뻐하게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포도원이다.

모두가 일할 기회를 가지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함께 일하는 세상, 사회가 근사치적 하늘 나라다. 포도원 주인의 목적은 고용을 창출하는 데만 있지 않다. 생활급을 보장해 주고자 하는 데만 있지 않다. 좋은 포도원을 만드는 것도 동시적인 목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세상,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하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데 장애가 되는 사람이 있다. 5시에 합류한 일꾼을 환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눔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눔의 기쁨이 없는 사람이다. 맨 먼저 오게 된 사람들은 주인에게 투덜거린다. ‘여러 악조건과 싸워 온 우리를 나중에 합류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한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온종일 빈둥거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고통과 그들이 일을 얻게 되었을 때의 감격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공유할 여유가 없다.

그들의 신은 경쟁이다. 그들의 목표는 자신의 승리다. 남보다 잘됨이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니다. 모두의 공동 승리가 아니다. win-win이 아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받아들일 준비와 여유가 없다. 이런 가치 의식을 불식하라고 포도원 주인은 그에게 요구한다.

오늘의 세계, 오늘의 사회는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고 있다. 20:80의 사회는 하늘 나라에 역행하는 것이다. 퇴출과 해고의 불안이 차 있는 사회는 하늘 나라에 역행하는 사회다. 삶의 질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는 하늘 나라에 역행하는 사회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의 대세다.

하늘 나라는 무엇인가? 저 포도원 주인과 같은 이상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여야 하겠다. 이 가치를 설교하자. 이 이상을 가르치자. 포도원 주인과 같은 사회 정신을 이루어 내자. 이것은 또다시 하나님의 주권의 실현이다. 20% 인간의 반동에 대한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다. 이를 받아들이기 바란다. 작고 큰 실현이 있기를 바란다.

[디모데전서 4:1-8] 경건의 연습과 허탄한 신화 – 1998년 9월 22일, 김상근 목사

9월 20, 2026

경건의 연습과 허탄한 신화

디모데전서 4장 1-8절 / 공주세광교회 / 1998년 9월 22일


[회상 노트]

공주 세광교회가 교외 한적한 곳으로 교회를 옮기고 거기에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교회당을 건축했다. 그리고 이상호 목사의 담임목사 취임과 장로와 권사 임직식을 가진다. 특히 이 목사는 기거할 거처가 없는 장애우와 함께 사는 교회를 하겠다고 했다. 가상하고 고마웠다. 어느 목사가 이리 하겠다 하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사실 그랬다. 혹 이것도 위장된 반(反)성직자 수단이 되어서는 정말 안 되는데. 나는 진심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나를 그에게 비추어 부끄러움을 확인했다.

교회의 민중성 지속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신분 상승과 좀더 나은 조건을 얻기 위해 매진한다. 어떤 권(權)이라도 가지면 그것은 곧 민중 현실을 망각하는 지렛목이 되기 일수다. 가짐 - 성취와 잊음은 정비례한다. 가짐과 잊음은 정비례한다. 가짐과 민중성은 반비례한다.

나는 어느새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민중성 - 민중지향성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몸부림했다. 나의 실존 깊이에서는 갈등하고 부딪힘이 깊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세광교회가 세워진 지 14년이다. 드디어 교회당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 네 분의 권사님이 더해지고 첫 장로를 임직하게 되었다. 세광교회가 기어코 조직 교회가 되고 이상호 목사님께서 담임 목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세광교회 교인 여러분에게는 물론이요 여기 이 예배에 참예한 우리 모두의 감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세광교회는 큰 교회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 생명이 약속되어 있을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교회당 하나, 우람한 교회당 하나 갖지 못한 주제에 불우 아동 선교니 장애인 선교니 개척 교회 지원이니 해외 선교니 문서 선교니 하면 교인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오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여기에 생명이 약속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경건 자체에 미치지는 못했을지라도 경건의 훈련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망령되고 허탄한 관심을 물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경건함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금 봉독해 드린 디모데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대는 믿음의 말씀과 그대가 지금까지 좇아온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하십시오. …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세광교회와 이상호 목사 그리고 이 교회 교인 여러분이 오늘의 이 교회를 이렇게 지속하고 있는 것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거부해 온 것이다. 그것은 경건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한 것이다. 여러분의 경건 훈련은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줄 것이다.

목사는 목회자다. 목회자란 어떤 기능을 전제한다. 교회 교인들을 잘 돌보고 그 교인들을 잘 조직하여 교회를 크게 하는 전문 교회 경영자를 연상하게 한다. 성공한 목사라 할 때는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목사라는 뜻을 가진다.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평신도들도 목사에게 교회 성장을 요구한다. 신학교 교수들도 교회를 성장시키는 능력과 기술을 가르치도록 요구받고 있다. 순수 신학을 강의하는 선생님은 “선생님, 선생님이 지금 가르치시는 내용은 현실 교회에 적합하지 않습니다.”라는 핀잔을 학생들로부터 받는 일이 허다하다.

세태가 이러하니 우리 목사들은 교회의 성장에 급급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가끔 성공한 목사들을 만난다. 대교회 목사다. 그 교회에 가서 설교하기도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주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을 꾸짖으신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이 하는 행실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 잔치에서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이 자기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기를 즐긴다. …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 23:25-28).

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에게서 보게 되었던 행태를 오늘날 우리 목사들에게서 보게 되지 않는가? 좀 그럴듯한 일을 하게 되면 세상에 나팔을 분다. 수재민을 돕는 헌금도 사진 찍어 방송하는 데를 골라낸다. 어떤 모임에서나 높은 자리를 탐낸다. 좀 이름 있다 하는 목사들은 그러하다.

어느 집회에서 목사들이 다투어 단상 의자를 차지하고 앉는 바람에 정작 기도를 맡은 목사님은 일반 회중석에 앉았다가 기도하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인사받기를 즐기고 먼저 인사하려 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것도 ‘나, 기도한다.’라고 광고한다. 섬기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종이 되려 하지도 않는다. 거만하고 탐욕스럽고 방자하다. 이런 행태가 우리 목사들, 특히 유명하다는 목사들에게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인가? 그렇게 거드름을 피워야 인정받는다. 유명해진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지도자들을 가리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고 하신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아라. …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네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마 6:1-4).

“너희는 금식할 때에 …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말아라. …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데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보시게 하여라”(6:16-18).

“너희 사이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20, 24, 28절).

이런 목사, 이런 장로, 이런 권사, 이런 교회를 주님께서는 찾고 계신다. 의로운 일을 하되 남에게 보이 려는 의도를 갖지 않는다. 자선을 베풀어도 아무도 모르게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 기도할 때도 조용히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게 한다. 섬기고 종이 된다. 이런 지도자를 찾는다.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왜 그럴까?

그렇게 해 가지고는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큰 교회, 재력 있는 교회를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일까? 이것이 우리의 경험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나팔을 불지 않는 목사는 인정을 받지 못하기 일쑤다.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목사는 인정을 받지 못하기 일쑤다. 탐욕을 부리고 방자하게 굴어야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성직자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하지 않으려 하는 애씀이 경건의 연습이다. 경건의 훈련이다. 허탄한 신화를 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상호 목사는 경건을 애써 훈련하고 연습하는 것을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목사는 전문 경영인이기에 앞서 종교인이요 신앙인이다. 그에게 깊음이 있고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생명이 있어야 한다.

오늘 장로로 임직하게 되는 장진배 집사님, 권사가 되시는 네 분 집사님, 이 교회를 사랑하라. 그리고 목사님을 존경하라. 큰 교회를 요구하기보다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라. 경건의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준다.

[마태복음 4:17] 회개와 역사의 전진 – 1998년 8월 6일, 김상근 목사

9월 20, 2026

회개와 역사의 전진

마태복음 4장 17절 / 5ㆍ18구속자석방기도회 / 1998년 8월 6일


[회상 노트]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의 첫 조각이 우리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종필 씨를 국무총리로 삼겠다고 했을 때 우리 모두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건국 이래 선거에 의한 첫 정권 교체에 거는 국민,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 민주화 세력의 기대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개혁으로 가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DJP라고 하는 연합으로 탄생한 정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절대 과제를 안고 출범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를 펼 조건이 못 되었다. 아마 ‘대중경제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대통령의 실의는 깊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오랜 연구 소산이요 신념이었다. ‘국제금융기구’(IMF)의 도움과 그들이 내놓은 요구를 수용해서야 그 국가 부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핵심적 요구는 신자유주의 수용이었다. 과거 청산은 고사하고 양심수 석방조차 녹녹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권이 하는 일이 도무지 못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정권의 한계와 대통령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나는 우리 민주화 세력과 정권 사이에 서서 당기고 밀고 끌면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랐던 우리의 비전을 현실화시키고자 애썼다. 혹은 정권을 힐책하고, 혹은 격려하고, 혹은 싸우고, 혹은 대화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거의 반년이 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8ㆍ15 광복절에 양심수를 크게 석방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보는 그렇지 않았다.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다시 하자 한다. 착잡했다. 날 더러 설교하란다. 설교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기독교의 역사관은 궁극적으로는 낙관론이다. 그러나 역사는 잘못된 것을 청산함으로 전진한다. 역사에 있어서의 청산을 우리 기독교 언어로 말하면 ‘회개’다. 방금 봉독한 말씀,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는 무슨 뜻인가? 하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회개함으로 하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하늘 나라란 언제나 코앞에 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그 하늘나라는 없는 것이다.

오늘의 잘못된 역사를 청산할 때 역사는 전진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전진은 없다. 역사에는 시(是)와 비(非)가 언제나 함께 있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몽땅 옳은 현재도 없고, 몽땅 그른 현재도 없다. 시와 비가 함께 있다. 시를 세우고 비를 청산하는 것이 역사의 창조요 전진이다.

우리는 건국 50년 동안 역사의 청산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건국 초기의 역사의 청산은 무엇이었나? 독립투사, 일제에 항거했던 민초들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일제 아래에서 그들은 억압을 받아야 했고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들을 제 값으로 평가하는 것이 해방이었어야 했다. 그것이 회개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정치적 조건의 불가피성이 그것이었다. 친일 세력이 온 나라를 틀어잡고 있었다. 사회, 경제, 문화, 사법, 교육, 종교, 체육, 어떤 영역도 그들의 손 밖에 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을 제쳐놓고 나라를 세울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는 두려움을 가질 만했다. 그래서 일본 저항 세력을 나라의 중심에 세우지 못하고 친일 세력, 부일 세력을 역사의 주역이 되게 했던 것이다.

이 나라 역사의 전진이었을 리가 없었다. ‘시’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고 ‘비’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회개가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올 수 없었다. 청산하면, 회개하면, 거기, 바로 거기에 있을 하늘 나라를 우리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역사는 5ㆍ16으로 이어졌고 5공, 6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역사의 회개를 위한 투쟁이었다. 정권 교체를 갈망했던 것은 역사의 청산, 하늘 나라를 여기에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건국 50년 만에 처음으로 정권의 교체를 이루어냈다.

현 정권은 많은 역사 청산을 시도하고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 구속자를 석방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소 자기가 집권하면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겠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평소에 밝혀 왔던 그의 소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1. 나는 비전향 장기수들은 모두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냉전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직 지나가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냐 한다면 지나가게 해야 한다고 내 표현을 정정하겠다. ‘비전향 장기수’는 지난 시대의 유물이다. 새 시대를 열려고 한다면 지난 시대의 유물은 벗어 던져야 한다.

2) 그들은 모두 장기수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나이가 많아졌다. 구속 당시의 그 사람이 아니 다. 30년, 40년을 철장 속에 가두어 둔다는 것은 비인도적이다. 어느 나라든 장기수가 있다는 것은 그 나라의 부끄러움이다. 역사가 변화하지 않고 그 세력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3) 비전향자니, 전향자니 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다. 우리 사회는 사상의 자유를 감당할 만큼 힘을 가졌다. 물론 사상의 자유가 곧 범법의 자유는 아니다. 나와 다른 사상을 범법으로 몰던 시대는 청산해야 한다.

4) 더구나 날조된 사상범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공산주의자로 몰린 것도 억울한데, 그래서 10년 이상씩이나 옥살이를 한 것도 억울한데, 공산주의자였는데 이제는 돌아섰다고 하라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성공회대학교의 신영복 교수도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다. 그러나 그는 건강한 시민, 건강한 국민, 국민을 지도하는 지도자의 삶을 살고 있다. 한 사람의 양심의 자유라도 존중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요 청산이다.

모든 비전향 장기수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석방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여기에 다가온 하늘 나라를 활짝 열게 되기를 바란다.

2. 모든 양심수는 조건 없이 석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지난 시기의 양심수는 피동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실정법을 어겼다고 하더라도 그 시기의 정치 상황이 그렇게 몰고 간 바가 없지 않다.

지난 시기에 당국의 허가 없이 북한으로 달려간 학생들이 있었다. 많은 경우 반통일적인 정부와의 투쟁 수단이었다. 북한을 다녀온 젊은이들을 만나보라. 그것은 대정부 투쟁이었지 사상적 행동은 아니었다. 폭력을 행사한 경우도 그렇다. 상황이 폭력을 유도했고 폭력 행사가 불가 피하다고 판단케 했던 바가 없지 않았다. 양심수로 분류되는 모든 구속자를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역사의 청산이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그들이 바뀐 시대, 바뀌어야 하는 시대에서도 그대로 감옥에 있다면 해방 후의 역사적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다. 석방은 회개다. 청산이다. 다가와 있는 하늘 나라를 활짝 열게 되기를 바란다.

3. 이른바 준법 서약서 제출을 석방의 조건으로 하는 것을 나는 반대한다.

전향서를 폐지한 것은 잘한 것이다. 또 마음에도 없는 글을 일정한 양식에 따라 쓰게 하던 것을 폐하고 자유롭게 쓰되 준법하겠다는 내용을 담으면 된다고 한 것도 잘한 것이다.

1) 그러나 준법 서약서 요구는 양심수들에게 갈등을 일으킨다. 법을 어긴 적이 없는데, 따라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괴로워하는 그에게 앞으로는 법을 지키겠다는 뜻의 글을 쓰라는 것은 양심의 갈등을 일으킬 뿐이다. 전향서를 쓸 이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전향서를 쓰게 되었을 때 일으키는 갈등과 같은 것이다. 민주화의 동지들에게 훈장을 주지는 못할 망정 괴로운 덫을 씌울 수는 없다.

2) 동지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게 한다.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을 갈라놓는다. 자칫 쓴 사람은 투항자요 쓰지 않은 사람은 지사라는 분열 구조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동지들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소지를 제공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3) 물론 나는 기회가 있는 대로 양심수들에게 준법 서약서를 쓰고 나오라고 권한다. 준법 서약서 요구는 잘못된 것이나 그 동기는 풀자는 것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준법 서약서라도 받지 않으면 석방할 수가 없는 현실이고 그리되면 개혁의 가능성도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양심을 억압하자거나 괴로움을 주자는 발상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되면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한다.

비전향 장기수와 양심수의 전원 석방, 준법 서약서의 철폐를 온전하게 이행하지 못하는 정부의 한계를 한편 이해한다. 보수 진영의 거센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박준규 씨를 국회의장으로 세우고, 김종필 씨를 총리로 세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엇인가? 박준규 씨가 국회의장에 당선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총리의 인준을 바라는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국민의 현실이다. 국민의 판단이다. 국민의 표다. 갖가지 선거에서 유신 본당과 국민회의가 손을 굳게 잡고서야 유신 잔당을 이길 수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아직 국민의 다수는 개혁의 편이 아니다. 보수의 편이다. 자민련 없는 김대중 정권은 금새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나는 이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개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기술을 용인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회개를 미루면 안 된다. 척결을 주저하면 안 된다. 개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지난 시기의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는 것이 시대의 회개다. 역사의 척결이다. 그것이 양심수 개혁이다. 현실을 내세워 저 건국 초기와 같이 친일, 부일 세력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집권 5년 내내 반개혁 세력의 볼모로 지난다면 정권 교체의 의미는 크게 퇴색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주장이 현실성 없는 주장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또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1천만 기독 신자들을 개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 성직자들의 몫이다. 교인이 개혁으로 나아가고 그것을 토대로 국민을 변화시켜야 한다. 국민을 변화시키는 일도 우리의 몫이다. 국민이 개혁을 지지하게 하는 일도 우리의 몫이다. 이 정부가 개혁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도 우리의 몫이다. 이 몫을 우리가 감당하지 않으면 결국 친일, 부일 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반개혁 세력과 엉거주춤한 동거를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초의 정권 교체는 의미 없이 깃발을 내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오늘 구속자 석방을 기도하고 외친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자 석방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하늘 나라-역사의 전진-역사의 창조를 목표로 한다. 구속자 석방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역사 창조로 이어질 때, 하늘 나라로 이어질 때 더 온전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전진을 위한 투쟁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되 개혁으로 가고, 그렇기에 그 정부를 국민이 지지할 수 있게 만들자. 이것 은특정인을 지지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역사를 전진케 하자는 것이다. 철저한 회개가 현실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할 때 역사는 전진한다. 그럴 때 ‘국민의 정부’다. 그것이 회개다. 하늘 나라가 다가와 있다.

[신명기 5:6, 12-15] 하나님의 이상은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 1998년 7월 5일, 김상근 목사

9월 20, 2026

하나님의 이상은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신명기 5장 6절, 12-15절 /성남외국인노동자교회


[회상 노트]

김해성 목사가 담임하는 성남외국인노동자교회에 갔다. 그날이 아마도 창립예배 날이었던 듯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더불어 사는 것이었다. 이웃은 물론이고, 짐승들과도, 심지어 미물들과도 함께 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외국인 노동자들과도 함께 살려 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죄된 본성이 근본적 문제다. 그러나 그 탓만 하는 것은 신앙인이 할 일이 아니다.

그날 거기 예배에 참예한 여러 교인들과 목사들을 염두에 두고 한 설교였던 것 같다.

지금도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 중 여러 사람들이 한때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옛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무탄트』라는 체험 소설이 있다. 어떤 미국의 여의사가 한 호주 원주민의 초청을 받고 그들과 함께 긴 순례를 하게 된다. 그 순례에서 깨달은 것을 소설로 써 낸 책이다. 호주 원주민 중의 한 종족인 그들을 여의사는 “참 사람”이라고 부른다. “참 사람”들은 그 행진을 끝으로 지구에서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이유는 지구가 더 이상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지구를 그들이 왜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라 했던가? 본래 지구 위의 모든 것은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제 욕심만 채우려 하고, 그 결과는 더불어 살던 세계를 몽땅 부수어 버렸다. 더 이상 더불어 살 수 없는 지구에서 그들은 스스로 집단적으로 죽어 없어졌던 것이다. “참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인간을 가리켜 ‘무탄트’라고 부른다. 그들 언어로 ‘돌연변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사람인데 정상이 아닌, 갑자기 유전자에 이상이 생긴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무탄트’라고 한 것이다.

지구에 함께 있는 모든 것은 한 몸과 같은 존재들이 었다. 각각 떨어져있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큰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유기체다. 이것이 ‘참 사람’들의 철학이요 신앙이었다.

‘무탄트’들은 지구 위에 아무 쓸데없고 해만 끼치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파리도 그런 것일 것이다. 더럽고 징그럽다.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물이 귀한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헤매었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목욕은 어떻게 했을까? 태어나서 10년, 20년 목욕한 번 못하고 살 수 있었을까?

‘참사람’들과 여의사가 함께 행진하는 도중에 저쪽으로부터 파리 떼가 새까맣게 쏟아져 몰려오는 것이다. 여의사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허둥지둥한다. 그런데 ‘참 사람’들은 환성을 지른다. 무척 좋아한다. 파리떼가 덤벼들기 시작한다. 여의사는 손을 휘젓고 몸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파리 떼와 싸운다. 그의 공격에 맞아 죽는 파리들도 많다. ‘참 사람’들이 여의사를 만류한다. 그러지 말고 옷을 벗고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한다. 여의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참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몸에 조금 걸쳤던 쪼가리조차 벗어 던진다. 그리고 몸에 힘을 풀고 가만히 서 있는다. 파리 떼가 새까맣게 몸을 뒤덮었다. 얼마 후 파리들은 일제히 어디론가 날아간다.

이런 일이 다시 닥쳐왔다. 여의사는 온갖 역겨움을 참고 옷을 벗고 몸을 내맡겨 보았다. 파리들이 몸에 앉기 시작한다. 눈을 슬며시 뜨고 제 몸뚱이를 보았다. 마치 까만 갑옷을 입은 것 같았다. 파리들은 열심히 제자리에서 움직이며 무언가를 한다. 그러더니 일제히 날아간다. 이게 웬 일인가? 자기 몸이 깨끗해진 것이다. 머리도 감겨 주고 귀 속, 코 속 모두 깨끗하게 씻어 준 것이다. 참으로 오랜 만에 때밀이의 도움을 받은 사우나 목욕을 한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파리 같은 것을 왜 만드셨을까? 쓸데없는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쓸데없는 짓을 하셨다. ‘참 사람’들은 파리와도 유기체였다. 더불어 살고 있었다.

오늘 새벽 이 원고를 쓰고 있는데 내 책상머리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우리 집에는 파리가 없다. 그런데 웬 일로 내 앞에 파리가 있다. 이것을 잡을까, 그냥 놓아둘까, 죽일까, 더불어 살까? 어떻게 했겠는가? 옆에 있는 신문지를 말아서 잽싸게 때렸다. 파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다. 나는 그래서 ‘무탄트’ 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명령하신다.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훗날 유대인들에게 큰 짐이 되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일’이란 그러면 무엇인가? 일이란 무거운 것을 든다거나 그런 것이다. 무거운 것이란 얼마의 무게일까? 단추를 한 개 달 만한 실을 바늘에 꿴 무게 이상의 무게를 가진 것을 들면 안식일 성수를 안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규제가 생기게 되었다. 안식일 성수가 좋고 기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일 성수 명령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너도 일하지 말아야 하지만 너의 아들딸도, 남종도 여종도 일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나아가 네 집의 소나 나귀나 어떤 집짐승에게도 일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너희는 쉬고 다른 사람이나 짐승들에게는 일을 시킨다면 이미 거기에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깨어진 것이다. 강조점은 ‘너, 쉬어라’는 데 있지 않다. 신분의 차이가 생기고 그래서 차별이 있게 되었지만, 누구는 주인이 되고 누구는 남종, 여종이 되었지만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요 믿음이다. 심지어 짐승까지와도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요 믿음이다.

‘그렇지 않은 세상을 너희가 경험했지 않느냐? 더불어 함께 살지 않는 세상을 너희가 경험했지 않느냐?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를 생각해 보아라. 거기에 기쁨이 있었더냐, 감사가 있었더냐, 사는 즐거움이 있었더냐?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끌어 냈다. 그랬으니 너희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이상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남종도, 여종도, 식객도, 소나 나귀도 모두 쉬게 하라는 명령을 주시고는 이렇게 마감하신다.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하나님의 이상은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세상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라. 여기, 이 땅에 불평등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출애굽시키실 것이다. 그래서 기어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실 것이다.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전5권)에 대한 서평 - 이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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