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제1권 제3호] 정사와 기원 : 우리 - 장공

3월 31, 2026

靜思[정사]와 祈願[기원] 

長空[장공]

  •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29.
  •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111.
  • 『낙수』, 1940년 - [바로가기]

『우리』

요한이 예수께 엿자온대 『우리가 보니 한 사람이 主[주]의 일홈으로[1] 邪鬼[사귀]를 내어쫓거늘 저가 「우리」를 따르지 아니한 연고로 「우리」가 禁[금]하였나이다』(막 9:38) 그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일홈으로[1] 邪鬼[사귀]를 내쫓는데 그리스도의 愛弟子[애제자] 요한으로서 웨 그것을 禁[금]하였는가? 그가 邪鬼[사귀] 내쫓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고 그 좋은 일을 그리스도의 일홈으로[1] 行[행]한다. 本質的[본질적]으로 보아 그의 하는 일을 禁[금]할 理由[이유]가 없다. 그러나 弟子[제자]들의 禁[금]한 理由(이유)는 그 어떤 사람이 「우리」 그룹이 아니라는 點[점]에 있었던 모양이다. 弟子[제자]들은 그때 그리스도의 恩惠[은혜]를 自己[자기]네만이 獨占[독점]한줄로 알었다. 自己[자기]네가 專賣特許[전매특허] 맛흔[2] 것인 줄 알었다. 그들은 信仰統制[신앙통제]의 엄청난 野望[야망]을 達成[달성]하기 爲[위]하야 主人[주인]되는 그리스도 自身[자신]에게 엿주어 보기도 前[전]에 벌서 그 사람의 信仰生活[신앙생활]에 한 鐵甲[철갑]을 채워 놓았다. 그러고 追後承諾[추후승락]을 받으려는 것이였다. 그러나 『禁[금]하지 마라! 우리를 拒逆[거역]하지 안는 사람은 곧 우리를 爲[위]하는 사람이니라. …… 너희 속에도 소곰을 치고 서로 화목하라』 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슴하셨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는가! 이런 血肉[혈육]에 屬[속]한 생각으로 敎會[교회]를 指導[지도]하야 分裂[분열]과 憎惡[증오]를 助長[조장]하는 일은 없는가? 「우리」 「우리」! 퍽으나 情[정]다운 말이다. 그러나 「우리」를 그리스도의 王座[왕좌]에 안치고[3] 그리스도의 代身[대신]에 우리를 내여세우면 結局[결국] 이 「우리」는 暴君[폭군]이오 「우리」의 行事[행사]는 惡政[악정]이 되는 것이다. 다만 「福音[복음]의 宣傳[선전]」 「사랑의 實行[실행]」을 爲[위]한 「우리」, 「섬기기 위한」 「우리」만 있게 하옵시고 權利[권리]잡기 爲[위]한, 信仰統制[신앙통제]를 爲[위]한 우리는 決[결]코 생기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하야 主[주]님이 모든 데에 直接[직접] 主管[주관]하시며 모든 權勢[권세]와 榮光[영광]은[4] 主[주]님의 것으로만 있게 하옵소서.





[각주]
1. 『낙수』에는 ‘이름으로’
2. 『낙수』에는 ‘맡은’
3. 『낙수』에는 ‘앉히고’
4. 『낙수』에는 ‘榮光[영광]을’

[범용기 제4권] (5) 서장 - 자유라는 것

3월 31, 2026
[범용기 제4권] (5) 서장 - 자유라는 것

자유라는 것

인간이 “자유”를 원한다는 것은 인간이 이것 저것 다 갖고 있는데 거기다가 자유까지 곁들어 갖고 싶다는 분수 밖에 욕심이 아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기 위한 존재로서의 원초적인 조건이다. 인간이 “자유”를 잃으면 “주체” 노릇을 못한다. 자기가 객체화한다. 그래서 힘센 녀석의 종이 되기도 하고 폭력배에게 전당[1] 잡힌 전당포 물건도 된다. 어떤 깡패 두목은 무섭게 독재한다. 그러면서 “나는 선의의 독재자다”, “내가 너희를 잘 살게 해 준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차관[2]도 얻어주고 산업도 일으켜서 벼락부자 몇 놈이 생긴다. 가난뱅이가 갑자기 부자되며는, 들떠서 돈 귀한 줄 모른다. 돈 한 푼이 인간들 피의 응고체란 것을 모른다. 그래서 그 돈이 살인, 강도, 탕녀, 잡귀들 바지가락 치마자락에 흘러들거나 아니면 독재자 자신의 “도물시장”[3]에 바쳐진다. 그래도 워낙 긁어 쌓은 노적가리[4]가 크니까 그 정도로서는 바닥이 안 난다. 나라 재산이 온통 자기 사유물인줄 아는 “독재자”는 질투를 느낀다.

“네 놈이 누구 덕에 부자 됐는데! 독재하려면 돈이 한없이 든단 말야! 이리 좀 가져와!” 몇 억 실어간다. 독재자 버릇은 갈수록 나빠진다. “선의”로서는 “독재”가 안된다. 권력에 중독되고 권력중독은 돈이란 캠풀 주사를 맞아야 한다. 권력중독이나 아편중독이나 마찬가지다. “이놈아 그 주사약, 그 제조공장 할 것 없이 몽땅 갖다 바쳐…”, “안 바치면 뺏는다. 안 뺏기려면 죽는다”, “죽이고서 뺏는다.”

그래서 이병철은 삼십분 안에 문화재단이나 문화방송이니 하는 것들을 고스란히 뺏겼다. 독재자가 어떤 녀석을 살지게 잘 먹여 길렀다면 그건 자기가 필요한 경우에 잡아먹기 위한 “가축”으로서의 사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한번 자기의 자유를 뺏기면 그 하회는 “인간상실”인 것이다.

창세기를 읽어보라.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로 지어졌다. 하나님은 자유다. 하나님 위에 앉아서 하나님을 이래라 저래라 할 더 “슈퍼”한 존재는 없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라면 인간은 자유다. “자유” 없이 인간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자유는 그 자유를 갖고 하나님을 반역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순종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다. 선택의 자유가 그 근원에서 부정됐다면 그건 자유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로버트”다. 로버트나 콤퓨터가 아무리 영리해도 인간이 만지작거리는 단추며 “키이”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지 생물은 아니다.

예수가 열두 제자를 택했다. 그 중에는 가룟 유다가 섞여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시골 사람이었지만 유다는 도시인으로서의 “스마트”한 인간이어서 “돈”의 값어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를 “은” 30에 팔았다. 그런데 예수는 그걸 눈치 챘으면서도 제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배반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유다”의 자유선택을 억제하지 않았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반역하는 유다가 기계로서 순종하는 유다보다 더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가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은 더 큰 경륜으로 그것을 인간 구원의 십자가에 포함시켰다.



[각주]
1. 전당(典當) -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맡긴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하여도 좋다는 조건하에 물건을 담보로 돈을 꾸어 주거나 꾸어 씀
2. 차관(借款) - 한 나라의 정부나 기업, 은행이 외국 정부나 공적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옴
3. 도물(盜物) - 훔친 물건
4. 노적가리 – 곡식 때위를 한데 수북이 쌓아 둠


[십자군 제1권 제3호] 정사와 기원 : 교만 - 장공

3월 31, 2026

靜思[정사]와 祈願[기원] 

長空[장공]

  •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28.
  •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110.
  • 『낙수』, 1940년 - [바로가기]

『교만』


에돔아!
네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絶壁[절벽]우 城砦[성채]에 머물어
높은 자리에 앉었으니
「누가 能[능]히 나를 바닥에 던지랴」고 혼자 말하도다.


네가 독수리같이 높은 데 집짓코,
별들 사이에 네 둥이를 틀지라도
거긔서 내가 너를 잡아 나리리라고
이것이 여호와의 말슴이시다(오바디아 3~4)


에돔의 驕慢[교만]에 對[대]한 警責[경책]이다. 진실로 무서운 것이 「교만」이다. 돈이 좀 있어도 교만, 地位[지위]가 조곰 높아도[1] 교만, 智識[지식]이 좀 많아도 교만, 信仰[신앙]이 좀 높아저도 교만, 그리고 이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도 교만만 남은 것이 우리 朝鮮[조선]사람이 아닐가 이것은 암만해도 하나님 앞에 直面[직면]하지 못하고 제 뱃굽만 나려다 보는 까닭인가 한다. 내가 진실로 全智[전지]하신[2] 하나님 앞에 섰을진대 어찌 敢(감)히 내 智識[지식]을 云謂[운위]할 생각이 나랴. 어찌 감히 내 믿음을 자랑하야 兄弟[형제]의 判官[판관]으로 自處[자처]할 생각이 나랴. 主[주]여 凡事[범사]에 謙遜[겸손]하게 합소서. 스사로[3] 별들 사이에 둥이를 틀었다가 당신의 손에 붙잡히여 땅바닥에 던져지는 무서운 審判[심판]에서 救援[구원]해 주소서. 아멘.



[각주]
1. 『낙수』에는 ‘좀 높아도’
2. 『낙수』에는 ‘전능하신’
3. 『낙수』에는 ‘스스로’

[범용기 제4권] (4) 서장 - “雜草”(잡초)의 단상

3월 31, 2026
[범용기 제4권] (4) 서장 - “雜草”(잡초)의 단상

“雜草”(잡초)의 단상

수필, 수상, 단상 등등의 문학 형식은 대략 같은 부족이라 하겠다.

수필이란 것은 생각나는 대로 단숨에 내리 갈기는 것이어서 때로는 “넌픽션 소설” 같기도 하고 “수기”(手記) 같기도 하다. 일인칭으로 엮었을 때에는 “자서전” 비슷하기도 하다. 국문학 전문가로서 시조 연구에 제일인자로 치부하는 서울대학 이병기[1] 박사의 글은 개인 일기체로 엮어졌지만, 담담하고 무사(無私)하여[2] 독자를 매혹한다. 한약재 사러 봉천 갔던 얘기, 어느 친구, 만나러 갔던 얘기, 그 친구는 그럴 수 없는 사인데도 돈량[3]이나 벌었노라고 뚱뚱보가 되어 오만스레 깔보던 얘기 담박하면서도 감초 맛이 달콤한 일기체 단장들이다.

한신대 제4회 졸업생 임인수[4] 같은 사람은 내향적이고 마음 밑바닥까지 침묵의 “아비스”[5]가 가라앉은 사람이었다. 원래가 시인으로 태어난 “혼”이었지만 너무 가난해서 마감에는 “술”로 화풀이하다가 청춘에 가버린 문학의 수난자였다. 내게 대한 신의는 언제나 진실했고 지금 L.A.에 사는 김형식 씨가 첨부터 알아주는 문학친구였다. 그의 “시”도 단장적인 그리스도 찬가로 엮어졌다.

이병기 박사의 “논문”도 국문학사에서 빼지 못할 명편들이겠지만, 논문의 장황함은 학문의 자랑일지 몰라도 번거롭고 어려워서 민중에게는 기가 질린다.

그런데 “단상”은 우선 길지가 않다. “이런 글쯤이야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두 장(章) 나도 읽을 수 있어!”

둘째로 제목과 내용이 장마다 다르다. “장”마다 딴 얘기다. 그런데 그 속에 “가시”가 있어서 따끔, 맘을 찌른다. 생활의 권태가 진력나던 참이라, 따끔 찔리는 가시를 환영한다.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셋째로, 따끔한 바늘 끝에 미래가 찍혀 나온다.

가령 병원에서 간장 검사를 한다하자, 간장이란, 묵중해서 아파도 아프다 하질 않는다. 아픈 줄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갈구리 달린 주사바늘을 간장에 찔러 넣어 빽 돌려서 빼낸다. 간장 조직이 갈구리에 묻어나온다. 그 작은 단편이 간장 진단에 결론을 내린다. 치료 방법도 고안된다.

“단상”은 짧지만 매운 데가 있고 긴 논문보다 따끔한 요소가 생동한다.

그래서 “단상”을 쓰기 시작했다.

“짧은 글”이라면 본국 있을 때에도 썼다. “제3일”에 발표된 것만도 51편이나 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지식인의 의식 구조를 찌르는 내용이 거의 전부였다. 이제는 더 내려가 “Grass Root”[6]에 뿌리를 내린다. 말하자면 “잡초 문학”이다. 그래서 이번 단상집은 그것만으로 독립시킬 작정이다. 나도 “잡초”라는 “의식인”이기 때문에!

[1981. 5. 15.]



[각주]
1. 이병기(李秉岐, 1891~1968) - 현대의 국문학자ㆍ시조시인. 호는 가람(嘉藍).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를 발기하였고, 1928년 ‘가요연구회’로 개칭하여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뤘으며, 광복 후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2. 무사(無私)하다 – 사사로움이 없이 공정하다.
3. 돈량 - ‘돈냥’(얼마간의 돈, 또는 남이 가진 꽤 많은 양의 돈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북한어
4. 임인수(林仁洙, 1919-1967) - 해방 이후 『땅에 쓴 글씨』를 저술한 시인, 아동문학가. 호는 현석(玄石) 또는 구촌(九村).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1944년 조선신학교를 졸업. 해방 이후 동시, 동화, 아동소설 등 아동문학작품 외에 시도 발표하면서 주로 잡지의 편집일을 보았다.
5. 어비스(abyss) - 심해, 심연(深淵), 땅의 깊이 갈라진 금, 한없이 깊은 것, 헤아릴 수 없는 것, 밑바닥
6. Grass Roots - 민중


[범용기 제4권] (3) 서장 - 短章이라는 것

3월 31, 2026
[범용기 제4권] (3) 서장 - 短章이라는 것

短章이라는 것

한국에서는 글을 쓸 때, 集(집), 篇(편), 章(장), 節(절) 등으로 정리한다. 그것은 문장이 그 문장을 쓴 인간과의 Integrity[1]를 읽고, “파편”으로 딩굴지[2] 않게 하기 위해서다. 실에 꿰매는 작업일 것이다.

短章(단장)[3]이란 것은 그 때, 그 때에 “먹구름”을 뚫고 “반짝” 섬광을 던지고서 사라지는 순간의 생각을 낚은 글이라 하겠다.

그것은 “논문”이 아니기에 “체계”를 무시한다. “시상”은 담겨 있어도 “시” 자체는 아니기에 “型”(형)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목적행위”로 행동하는 “인간의 삶”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단장”은 삶을 찔르는 “바늘”(針)이다. 그것이 병 고치는 주사바늘일 수도 있다.



[각주]
1. Integrity – 진실성, 도덕성, 위상, 고결함, 온전함
2. 딩굴다 - ‘뒹굴다’(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구르다)의 비표준어
3. 단장(短章) - 짧은 문장이나 시가

[범용기 제4권] (2) 서장 - 글을 쓴다는 것

3월 30, 2026
[범용기 제4권] (2) 서장 -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해방 후 얼마 안되어 『친일문학』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크기와 부피가 “웹스터 떡슈내리”[1]만큼이나 한, 거대한 몸집이다. 거기에 일제시대에 친일한 분들의 행동기록, 단체, 주동자, 개인으로서의 회원명단 등등이 적혀 있는가 하면, 이름난 문인들의 친일작품까지 샅샅이 폭로된다. 그것은 쓰여진 그대로였고 이미 공개된 것이니만큼 어느 누구도 항의할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왜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들먹이느냐고 속으로 불평하는 ‘명사’[2]들도 없지 않았다지만, 명예훼손죄로 고소한 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어느 문호(?)의 “천황찬가”란 일문 시는 드물게 보는 명작이었다.

국내 민족운동의 거물로는 이상재[3] 영감, 윤치호[4] 선생, 최린[5] 등등이 꼽히는 것이었다. 이상재 영감은 “지사”다운 마감맺히를 남겼지만 윤치호 선생은 비극을 남겼다. 국민복[6] 차림으로 남산신궁[7]에 오르내리시고 귀족원[8] 의원으로 일본국회에 드나드셨다. 그러다가 급작스레 “해방”되어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입국하고 보니 그 옛 친구들을 만나려니 부끄럽고 안만나려니 어색하고 양심은 끊임없이 불안하고 – 그래서 결국에는 개성에서 자결하셨다는 풍문이었다. 그 밖에도 그 동안에 변질된 분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만은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나 다름없는 마감날을 물려 주셨으니 두고두고 민족의 선생이심에 틀림없겠다.

강요된 행동, 입만으로의 “쎄리프”도 문제에 오르거든 하물며 제 손으로 쓰고 인쇄물로 공개된 글이 숨겨질 리가 있겠는가. “숨겨진 것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작은 것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莫現乎隱莫顯乎微)[9]는 옛 어른의 말씀이 돋보인다.

우리가 이제와서 구태여 이완용[10]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의 후예는 얼마든지 있다. 실종된 “지사”들, 카멜레온의 얼굴들이 거릿바닥에 전시품처럼 너더분하다.[11]

나도 글을 써냈다는 축에 들지 못하지만, 따지고 보면 “빽넘버”와 함께 휴지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도 많을 것 같으니 그런 “글”은 글이랄 수 없겠다. 그러면서도 고스란히 도서관 구석에 남아 천년만년 나를 대변하거나 나를 나무랄 것도 사실이다. 그 경우에 내 “글”을 속량[12]할 장본인은 “글” 보다도 나 자신의 삶과 죽음이 아니겠는가?



[각주]
1. 웹스터 사전(Webster Dictionary) - 19세기 초 노아 웹스터에 의해 편집된 사전들, 혹은 노아 웹스터의 참여와 관계없이 웹스터의 이름을 채택한 수많은 사전들을 말한다. “웹스터”는 미국에서 영어 사전의 상표가 되었었고 영어 사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2. 명사(名士) -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
3. 이상재(李商在, 1851~1927) -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皜), 호는 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 출신. 아버지는 이희택(李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19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1880년까지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의 집에서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신사유람단에 합류하여 일본에 가서 개화된 일본을 보고 돌아왔다. 이후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고 만민공동회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초야에 묻혔다가 1902년 6월 국체개혁을 음모하였다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1904년에 2월 석방되었다(이 당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국권이 빼앗긴 이후 YMCA 총무에 취임하여 사멸 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19년 3ㆍ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22년 신흥우 등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에 참석하여 한국YMCA 창설에 기여하였다.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 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연합하여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4. 윤치호(尹致昊, 1866~1945) -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다.
5. 최린(崔麟, 1878~1958) - 1878년 함경도 함흥 출생.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고우(故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 일제강점기에 3ㆍ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으며, 보성학교 교장(1911년), 천도교 도령(1929년), 중추원 참의(1934~1938, 1941~1945년), 매일신보사 사장(1938~1941년) 등을 지냈다. 1936년 ‘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선에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다. 해방 후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고 그해 4월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1958년 12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6. 국민복 – 1940년 11월 2일, 일본 제국 정부에서 쇼와 천황의 칙령 형식을 빌려 공포한 “국민복령”(쇼와 15년 칙령 제725호)에 따라 정해진 일본 제국 내 남성을 위한 표준 제복이었다. “국민복령”은 전시의 물자 통제령 하에 있던 국민의 의복 생활을 간소ㆍ획일화하여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해 육군성의 주도로 만드러졌다.
7.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토의 신사이다. 1925년 당시에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43만 제곱미터의 대지 위에 15개의 건물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에 일본인들은 스스로 하늘로 돌려보냄을 의미하는 승신식을 연 뒤 해체작업을 벌였고, 10월 7일에 남은 시설을 소각하였다. 이후 조선신궁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었고 안중근을 기념하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8. 귀족원(貴族院) - 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설치되어 중의원과 함께 입법부(제국의회)를 구성한 기관. 귀족원령(1889년 칙령 11호)이 정하는 바에 따라 왕족ㆍ화족(작위를 갖고 있는 사람과 그 가족)ㆍ칙임(덴노의 명으로 임명)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1947년에 폐지되었다.
9. 『중용』 제1장에 나오는 말.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愼其獨也니라”(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작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10. 이완용(李完用, 1858~1926) -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1958년 경기도 광주에서 가난한 선비 이호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세 때 판중추부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고, 13세 때 명문가문인 조병익의 딸과 혼인하였다. 25세 때 증광별시에 급제하여 관계로 진출하였다. 민비의 총애를 입고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 구한말 미국과의 교류가 긴요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1887년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1887년 알렌의 인도로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체류하였다. 귀국 이후 대미외교의 1인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5년 친미 친러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알렌의 이권 획득 요구에 적극 협조하였다. 1896년 알렌의 후원하에 이범진 등 친러파와 공모하여 ‘아관파천’을 성공시키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896년 7월부터 1898년 초반까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으나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진 책임으로 제명처분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승리하자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해 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을사5적’ 가운데 한 명으로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었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7적’ 가운데 한명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1909년 12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서 이재명의 피습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으나 운좋게 살아났다. 1910년 8월 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 체결 협상을 벌이고, 동년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 황제를 압박하여 합병조칙을 받아내면서 ‘경술9적’ 중 1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합병에 관한 공로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고, 1920년 후작으로 올라갔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게재하여 만세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하고 저항운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1926년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앓던 해수병이 악화하여 사망하여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으며, 정치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로 알려져있다.
11. 너더분하다 –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하다. 듣기 싫고 번거롭게 길다.
12. 속량 –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함. 남의 근심과 고난을 대신하여 받음

[범용기 제4권] (1) 頌壽(송수) 六聠句(육병구)

3월 30, 2026
[범용기 제4권] (1) 頌壽(송수) 六聠句(육병구)

頌壽(송수)[1] 六聠句(육병구)


엘리야를 부르신 하나님이

長空 先生을 일찍이 부르셨어라.

한밝[2] 겨레를 이끌고

카르멜[3]로 치달리도록

그래서 이세벨[4]과 바알[5]의 무리를

무찌르도록 하셨어라.


한밝 겨레의 엘리야도

이윽고 광야로 쫓겼어라.

하늘 나는 까마귀가 없었더라면

그인들 어이 견디었으랴.

어즈버[6] 이 기나긴 밤이

언제 새려 하는고야.


제3일이 동틀무렵인데

땅은 해를 머금고 토하려 않는고야.

뭍들과 바다들도

짐승들과 새들도

아직은 깊은 잠 졸려

깨려하지 않는고야.


그는 아직도 기다려라

영광스런 그 약속의 날을

못내 기대려라[7]


발돋아 기다려라.

東녘이 마침내 활짝이

꽃망울로 터지기를


그의 헤어진 옷은

누가 물려 받을 건가[8]

그 가슴에 타는 불은

누가 받아 피울 건가

昇天(승천)의 그 기약엔

타고 가실 불수레[9]


태양아 어서 떠오르라

대지야 어서 꽃피어라

골짝마다 살울림[10]

決士(결사)엔 흥타령

長天(장천)[11]에 비낄

서광[12]의 아침이여


一九八一年(1981년) 十一月(11월)

오타와에서

鄭大爲(정대위)[13]ㆍ李朱善(이주선)



[각주]
1. 송수(頌壽) - 80세를 일컬음. 아마도 1981년 장공 김재준의 80세 생신을 맞이해서 헌사한 시
2. 한 – 하나, 시(始)ㆍ원(元), 정(正), 영(永)ㆍ장(長), 광(廣), 중(衆)ㆍ다(多)ㆍ제(諸), 동일(同一)의 뜻으로 쓰임. 밝 – 본디 광명을 뜻함인데, 그것이 태양신의 대명사로 쓰였다. ‘한밝사상’은 대일광명을 뜻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3. 카르멜(carmel) - 이스라엘의 지명. ‘갈멜’이라고 함. 아셀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지로서(수 19:26), 길게 뻗어 있는 이스라엘의 해안 평야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와 바알 제사장들이 누가 참 신을 예배하고 있는지에 대해 겨룬 산이다.
4. 이세벨 – 페니키아의 해안도시 티레와 시돈의 군주였던 제사장 겸 왕인 에드바알의 딸이었다. 이세벨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BC 874~853경 재위)와 혼인한 뒤 아합을 설득하여 티레(두로)의 자연신 바알 멜카르트를 숭배하게 했다. 강한 정열을 가진 이세벨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으므로 야훼의 예언자들 대부분이 이세벨의 명령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녀는 결국 엘리야의 예언처럼 창문 밖으로 떨어져 개에게 먹혔다(BC 843년경).
5. 바알(Baal) - 고대 중동 지역에서 풍요의 신으로 알려졌던 고대의 신. 원래 셈족 언어로 ‘주인’이나 ‘소유자’라는 뜻의 보통명사였으나 BC 1400년경부터 풍요의 신이라는 의미로 숭배되기 시작했다. 유일신인 야훼를 믿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배교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후일에는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의 신으로 변천하게 되었다.
6. 어즈버 - ‘아’의 옛말
7. 기대리다 - ‘기다리다’의 방언
8. 열왕기하 2장에서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목격한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웠다고 기록되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13~14절)
9. 열왕기하 2장에서는, 엘리사와 함께 있던 엘리야가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 2:11)
10. 원문에는 ‘살울림’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산울림’인 듯
11. 장천(長天) - 멀고 넓은 하늘
12. 서광(曙光) - 새벽에 동이 틀 때의 빛
13. 정대위(鄭大爲, 1917~2003) - 목사·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재면의 아들로, 1917년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1935년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1941년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문학부 신학과를 졸업했다. 그후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959년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47년 조선신학교 전임강사, 1946~56년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 교수 및 서울 초동교회 목사, 1953~56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한국위원회 사무국장, 1959~61년 건국대학교 문리대학장, 1961~68년 건국대학교 총장, 1968년 독일 함부르크대학교 초청교수, 1968~69년 캐나다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목사, 1969~83년 캐나다 오칼턴대학 교수, 1983~87년 한신대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이후 캐나다로 돌아가 강연활동으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 〈기독교와 역사〉(1949)ㆍ〈그리스도교와 동양인의 세계〉(1986) 등이 있다.

[범용기 제3권](각주해설판) - 목차

3월 30, 2026

〖 범용기 제3권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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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각주해설판)을 발행하며

머리말


序章 : 1970년대 초기의 다양한 변화(1970~1973)


관용ㆍ정희 결혼하고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캐나다에 갔다 오고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1974. 1. 8 긴급조치

 

北美留記 第一年 1974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

 

北美留記 第二年 1975

 

北美留記 第三年 1976

 

野花園 餘錄

 

北美留記 第四年 1977

 

野花園餘錄

 

北美留記 第五年 1978

 

野花園餘錄

 

北美留記 第六年 1979

 

범용기 제3권을 엮고서


부록 :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범용기 제3권] (255) 범용기 제3권을 엮고서

3월 30, 2026
[범용기 제3권] (255) 범용기 제3권을 엮고서

범용기 제3권을 엮고서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논할 것 없이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중국이 동양에서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건들어지지지 않는 아무도 멸시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로 지축에 뿌리 박은 것은 6천년 때, “기록”을 갖고 있는 나라기 때문이다. 그 기록이 왕조사(王朝史)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친 깊은 바다 같은 풍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四庫全書”(사고전서)[1]만 겉으로 볼 기회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그 문헌의 목록만 훑어보는 것 만으로도 한 사람의 평생을 요할 것이라고 한다. 놀라운 “건조물”을 남긴 민족도 있다. 그러나 “기록”이 수반하지 않은 건조물은 역사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메리카 인디안의 “잉카문명”이란 것이 “신비”로 남아 있지만, 기록이 없으니 자랑도 없다.

우리나라 역사도 그렇다. 단군 千年(천년), 기자 천년이라지만 우리로서의 기록이 없다. 적어도 2천년은 “공백”이다. Black다. 위만 조선도 제대로의 기록이랄 수 없다.

삼국시대의 중 “일연”[2]이 비로소 우리 민족 국가로서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고[3], 김부식[4]이 “친중국”적인 기록을 썼다고 한다.

기록은 반드시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도 좋다. 위인전기 아닌 한 범인[5]의 삶의 기록이라도 무방하다. “위인”의 기록은 얼마 쓰여져 있지만, 그것도 공적인 영웅적인 사건 기록에 국한된 것이 거의 전부라 하겠다.

그러나 그런 공적인 사건보다도 그 사건 뒤에 움직인 Personal한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 Personal한 것 뒤에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더 두려운 역사를 그린다.

김구 선생은 “白凡逸志”를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이를 좀 더 진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서재필 박사는 자신의 자서전을 남겼기에 더 친근하게 모실 수 있게 된다.

“長空”의 “범용기”는 첫권 머리말에서 고백한대로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초라한 삶”을 “기록”한 것 뿐이다. 영웅적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기록이다. 한 가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를 나 되게 한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싶다”고 할 수는 있겠다.

“제3권”도 그런 각도에서 용납해 주면 고맙겠다. 대를 이어 건투하는 한국민주화 운동에 전진하는 동지들에게 축복있기를 빈다.

1982년 除後 長空



[각주]
1. 사고전서(四庫全書) - 중국 청나라 건륭 황제의 명으로 편집된 중국 최대의 총서. 1772(건륭 37)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782(건륭 47)년에 완성되었으며 궁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적 외에 전국의 민간에 소장된 서적을 전국에서 골라 모아서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네 부문으로 나누었다. 모두 3,503종 7만 9,337권을 수록했다. 7부(部)를 작성하여 여러 서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2. 일연(一然, 1206~1289) - 고려 충렬왕 때 <삼국유사>를 편찬한 고려의 승려. 경주의 속현이던 장산군(章山郡,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아버지 김언필(金彦弼)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견명, 자는 회연, 호는 무극, 목암으로 최씨 무인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에 머물면서 남해분사에서의 작업에 참가하게 됐다. 원종 2년 명에 따라 선월사에 머물면서 지눌의 법맥을 계승했다. 중앙정계와 관련을 맺은 후 이를 배경으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충렬왕 3년 명에 따라 운문사에 머무르면서 <<삼국유사>>의 집필에 착수했다.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불교신앙을 표방하는 저술을 찬술했으며, 선과 교를 막론하고 많은 불교 서적을 편수했다
3. 일연이 삼국시대의 스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삼국시대에 대한 저술을 의미한다.
4. 김부식(金富軾, 1075-1151) - 신라왕실의 후예로 증조부 위영이 신라가 망할 무렵 고려 태조에게 귀의,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이 되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은 아버지 좌간의대부 근 때부터였다. 그는 고려 중기 정계에서 활약한 부필ㆍ부일의 동생이며, 부의의 형이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 호는 뇌천. 고려 문종 때 서경 천도를 주장한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의 문신. 자는 입지, 호는 뇌천으로 인종 4년 이자겸이 제거된 뒤 경주세력의 대표로서 여러 직위에 올랐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경주계통 문신귀족의 역사적 정통성 확보를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이외에도 20여 권의 문집이 있다고 전해지나 존재하지는 않는다. 늙어서는 개성 주위에 관란사를 원찰로 세워 불교를 수행하기도 했다.
5. 범인(凡人) - 평범한 사람


[범용기 제3권] (254)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1979년 除夜回錄(제야회록)

3월 30, 2026
[범용기 제3권] (254)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1979년 除夜回錄(제야회록)

1979년 除夜回錄(제야회록)

79년 나에게 액운의 해였고 시련의 해였다. 그리고 노망(老妄)스런 해기도 했다.

가정적으로 맏딸 정자를 지난 연말에 먼저 보내고 금년에는 조카며느리 정옥을 저 세상에 앞세우고 줄곳 병석에서 신음하고 내 몸도 이런 병 저런 병으로 쇠잔한 생명을 먹고 있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읽는다.

“今是而昨非”(금시이작비)[1]가 “주홍글씨”처럼 내 살에 파고 든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님 은혜는 내 허물보다 컸다.

論語子張篇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子貢曰君子之過也如日月之食 焉過也人皆見之更也人皆仰之

(군자의 과오는 일식이나 월식과 같다. 과오가 있으면 사람들이 다 이를 보아 알고 그것을 고치면 사람들이 다 우러러 본다.)

“군자”란 것은 “도덕적인 지성인”을 말한다. 나 같은 인간이 “군자”축에 들겠는지, “소인”배에 들것인지 모르긴 하지만,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도 “소인”의 테두리를 방황한다.

“전 우주와 만물, 전 인간과 역사”를 “신”의 사랑 안에서 포옹하는 그날이 오면 그 밝은 속량의 찬가가 그 검은 배경 때문에 더욱 돋보일 것이 아닐까.

시편 제1편을 읽으며 제야의 종을 울려보낸다. (끝)



[각주]
1. 今是而昨非(금시이작비) - 오늘은 옳고 어제는 그르다


[범용기 제3권] (253)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토론토에서는

3월 30, 2026
[범용기 제3권] (253)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토론토에서는

토론토에서는

12월 25일(화) - 성탄날이다. “할머니”는 어제부터 열이 높아 효순의 주선으로 스카보로 종합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11AM에 나는 연합교회 성탄예배를 참석했다.

12월 26일(수) - 아침 8시반에 경용은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갔다. 전문의가 진단한 결과는 “폐렴”이란다. 입원수속을 끝냈다.

병실은 W.479실이다. 2PM에 나는 경용집에 돌아와 할머니 대신 꼬마 손주들을 돌봤다.

점심식사에는 효순이 준비한 빈대떡을 먹었다. 돼지고기 김치 등속[1]을 섞은 녹두지짐[2]이다. 별미였다.

전화로 “어머니” 입원한 소식을 이 목사와 혜원에게 알렸다. 은용에게는 전화가 통하지 않았다.

12월 28일(금) - 입원한 처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은 병원에 오지 말라는 것이다. 효순이 출근 중에 정성껏 돌봐줘서 맘 든든하고 많이 나았다고 했다.

민중신문사에서 신년휘호를 부탁하기에 나는 “陰風霧散 陽光遍照”(음풍무산 양광편조)라고 써 보냈다.

새해에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12월 29일(토) - 집에서 쉬었다. 교회 여러 분회에서 여러 가지 선물을 갖다준다. 정화가 병원에 와서 “할머니” 문병했고, 이 목사 부부, 은용 부부와 하륜, 남희도 왔다.

은용 부부와 아이들은 마캄의 경용 집에 들어 밤늦게까지 놀았다. 하령ㆍ하륜 등 사촌끼리가 그렇게 친할 수 없었다.

효순은 병원에서 근무한다. 효순은 정화네와 나를 병원식당에서 치킨디너에 초청했다.

밤 경용 집에 유숙했다.

12월 31일(월) - 1979년 마감날이다. 효순은 집안을 청소하고 오후 세시에 병원에 출근했다.

나는 서독 친구들에게서 부탁받은 신년휘호를 썼다.



[각주]
1. 등속(等屬) -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벌여 말할 때, 그 마지막 명사 뒤에 쓰여, 그 명사들과 비슷한 부류의 것들을 묶어서 나타내는 말
2. 녹두지짐 – 껍질을 벗겨 물에 불린 녹두를 갈아서 나물이나 고기 따위를 섞어서 번철에 부친 전


[범용기 제3권] (252)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보쿰에서

3월 30, 2026
[범용기 제3권] (252)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보쿰에서

보쿰에서

12월 14일(금) - 조반 후에 산중호 여관을 떠나 장 목사 내외분 동승 “보쿠움”에 갔다. 보쿠움 중국음식점에서 국과 채를 먹었다.

토론토에 가서 성탄선물로 나눠줄 자자부레한[1] 선물들을 샀다.

보쿠움 병원 우리 간호원들과 부근의 우리 교포들이 보쿠움 병원 우리 간호원 기숙사 한 방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예배 순서와 사회는 거기 모이는 간호원 아가씨들의 자치에 맡겨져 있었다.

장 목사는 설교만 한단다. 오늘은 내가 설교했다.

부근에 있는 강대인 군이 와서 예배에 동참했다. 대인군 아파트에 가서 늦게까지 얘기했다. 부인이 덕스럽고 첫딸애 윤애는 영리하고 귀여웠다.

본국에서는 계엄령은 선포되고 군인끼리 분열되어 총격전까지 있었다고 한다.

대인군 Apt.의 한 방에서 유숙했다. 윤애는 두 살백인데 한국말 독일말을 곧잘 한다.

“나는 할아버지가 셋이다. 강 할아버지, 김 할아버지, 이 할아버지!”

점심 먹고 떠날 때에는 할아버지 간다고 마구 운다. 수유리 명은애 같이 귀엽다.

6PM에 이삼열 박사 부부의 Apt.에 옮겨 거기서 유숙했다. 전기담요 속이 따뜻해서 온천장의 하룻밤을 연상시켰다.

12월 16일(일) - 오후 2시에 보쿠움 교회에 갔다. 이삼열 박사가 사회했다. 내가 설교 “인간의 시대”라고 제목을 붙였다.

점심식사는 교회에서 밥과 국과 김치를 준비했다. 질의문답 시간에는 “질의”보다는 걸고드는 반론이 많았고 “대답”을 기다린다는 것 보다도 자기 주장을 연설하는 사람이 많았다.

12월 17일(월) - 12시쯤에 장 목사 부부와 함께 듀이스벅 비행장에 나가 2시 30분발 “부리티쉬에야”[2]기로 서백림[3]에 날았다.

3:30PM에 서백림에 내렸다. 정하은 박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Apt.에 갔다.

오랫동안 쌓였던 정담과 그의 사하라 사막 여행담 등등이 새로 한시 반까지 계속됐다. Mrs. 정이 인절미를 꿀에 잰 중참을 들여왔다. 별미였다.

12월 18일(화) - 오전은 정 박사 댁에서 지내고 오후 6시에는 한독협회가 주최한 “한국의 날” 모임에 참석했다.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백인들이 출석의 3분의 2를 점령했다.

말하자면 독일인에 대한 한국문화선전의 날이었다. 한국무용, 탈춤, 한국노래 등등이 연출됐다. 김문환씨가 지도감독한 것이란다.

김문환은 자기가 창작안무한 “고민”이란 무용을 자기 혼자 몸으로 연출했다. 괴로움 몸부림이 지금의 한국이란 뜻일 것이다.

정 박사 댁에서 유숙했다.

12월 19일(수) - 정 박사 집을 9PM에 떠나 푸랭크풀트에 날았다.

정 박사와 路上作別(노상작별)은 서운했다. 再會(재회)의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푸랭크풀트 공항에는 손규태 부부가 기대린다.[4]

곧장 토론토행 Luthansa기에 갈아탔다. 북극권을 넘어 몬트리얼에서 한 시간 쉬고 토론토에 난다. 이 목사가 공항에서 맞이해 준다.

이 목사 집에서 그 동안의 정보를 교환하고 10시 반에 자리에 누웠다.



[각주]
1. 자자부레하다 - ‘자질구레하다’의 방언(평북, 함북)
2. British Air(영국 항공)
3. 서백림(西伯林) - 서베를린은 미국, 프랑스, 영국을 점령하던 지역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는데 옛 소련군의 점령지역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동베를린을 비롯한 독일민주공화국(동독) 내에 있는 자본주의 진영의 도시였다.
4. 기대리다 - ‘기다리다’의 방언


[범용기 제3권] (251)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西獨[서독]에

3월 30, 2026
[범용기 제3권] (251)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西獨[서독]에

西獨[서독]에

79년 12월 5일(수) - 6:45PM Luthansa기로 출발, 6시간 직항하여 서독의 Frankfurt에 내렸다. 손규태 부부가 마중 나왔다.

손규태 집에서 아침 먹고 끝없이 쌓인 얘기 하노라 피곤을 잊는다. 한참 잤더니 몸이 풀린다. 교회 분들이 시내의 회전전망대에서 간단한 식사를 대접한다.

12월 9일(토) - 오전 11시 비행기로 함부르크 박명철 목사 교회에 갔다. 오후 4시에 예배가 있었다. 내가 설교했다.

박명철 내외분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부인은 간호원 베터랜[1]인데 오랜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로 부군의 목회를 돕고 있었다.

박 목사의 좋은 상담역이고 동역자였다.

12월 10일(월) - 시내 중앙의 호숫가를 산책했다. 일기가 음산하고 춥다. 산책 기분은 동결(凍結)이다. 돌아와 쉬었다.

저녁에는 토론토에 이주했다가 다시 서독에 돌아온 이응천 씨 가정에 초대되었다. 회원 몇 사람 동석해서 시국담, 신앙담, 교회생활에서의 의문점 등등의 질의문답이 있었다. 12시에 박 목사 집에 돌아와 잤다.

12월 11일(화) - 겨울비가 내린다. 오전에는 집에서 쉬었다.

오후 한 시 반 비행기로 듀이스벅에 날았다. 약 30분 걸렸다. Ticket은 함부르크 교회에서 제공했다.

장성환 목사 내외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 목사 차로 장 목사의 선교지인 “루르” 탄광지대 그의 사택에 갔다. 사택 1층 객실이 내 침실이자 교회의 객실이다.

12월 12일(수) - 장 목사 댁에서 조반과 오찬을 대접받고 관광 Drive로 나가자고 한다. 두 후보지를 제시한다.

라인 강가 호텔에 유하면서 라인 강을 배로 오르내리겠느냐, 아니면 Saunesland Mohnesee 산중의 대호(大湖)를 차로 돌아다니다 오겠느냐였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전에 라인 강변 길은 왼종일 차로 달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변 가파로운 언덕이 모두 포도원이었고 거기 포도는 더 유명해서 값이 비싸다는 것도 그때 들었다. 그래서 다시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구경한 山中湖(산중호)는 듀이스벅 동북방 120km지점의 고산지대에 있다. 관광호텔에 들었다. 제11호 독방에 짐을 풀었다.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장 목사 부부는 12호실에 든다. 바로 옆방이다. 밤 4시까지 그 동안에 장 목사가 겪은 시련의 고충담을 들었다.

12월 13일(수) - 조반은 호텔에서 제공한다. 점심으로는 장 목사 사모님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맛나게 먹었다. 얘기가 무궁무진이다.

오후에 다시 호반에 나갔다. 나는 호반의 落照(낙조)를 찍었다.



[각주]
1. 베테랑[vétéran] - 한 분야의 일을 오랫동안 하여 그 일에 관한 지식이나 기능이 뛰어난 사람


[범용기 제3권] (250)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전두환 등장

3월 29, 2026
[범용기 제3권] (250)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전두환 등장

전두환 등장

79. 12. 12.에 전선사령관인 전두환은 소위 “숙군[1]쿠테타”를 일으켰다. “군인”인 박정희가 “군인”인 김재규에게 살해됐다는 것은 군율이 문란해졌기 때문이라는 구실로 우선 “숙군쿠테타”부터 착수했다.

그는 “박정희대통령살해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의 직위에 앉았다.

“군”의 제1인자라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자기 패거리인 “이희성 중장”을 대장으로 승격시켜 그 자리에 앉혔다.

동시에 “숙군쿠데타”에 동참한 수도경비사령관, 특전단 사령관을 등용하여 수비를 강화했다.

어떤 최고권력자가 급작스레 살해됐을 경우, 그 범인을 신속 체포하여 처형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찬탈 행위를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전략이란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그래서 박정희를 살해한 KCIA부장을 사형에 처함과 아울러 정승화 총장에게도 중형을 가하고 자기 자신이 KCIA부장직을 겸임하여 KCIA를 완전히 장악했다.

전두환은 이에 성공함으로써 박정희의 후계자란 면목을 세웠다. 그리고서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반체제의 제일인자인 김대중을 비롯하여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 박정희 직계 실력자들도 체포해 버렸다.

그리고 이미 구상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자리에 취임함으로 해서 박정희를 계승한 권력의 제1인자가 됐다.

이 음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육참총장 관저 부근과 국방성 주위에서 대규모의 총격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사상자 실수는 후일의 역사가가 밝혀줄 것이다.

지방으로서는 전라도가 눈에 가시같이 찔른다. 전라도는 야당 제1인자 김대중의 고향이니만큼 전두환에게 심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5ㆍ17 쿠데타 직후에 광주사변을 일으켰다.

일어났달 수도 있고 일으켰단 수도 있어 그 내막도 알숭달숭이다.

전두환은 “종주국”(?)인 미국 “인지”(認知)를 받아야 했다. 특히 군대는 미8군사령관의 지휘권 아래 있다. 전두환은 체제확립의 보장을 신임 미국대통령 “리건”에게 제청했다.

“리건”도 자기 정권의 “안보”를 위해서는 한국의 안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리건은 전두환의 요청에 따라 “전”을 와싱톤에 불렀다. 그래서 자기의 “매파”(鷹)로서의 외교자세를 과시했다.

“한국 정권이 안보만 제대로 해 준다면 인권탄압 등 다른 사태는 ‘내정불간섭이란’ 간판 아래 봐준다”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민주”고 윤리고 없는 것이고 다만 집권욕만이 돋보이는 것이다.

그 후의 “미”와 “일”의 다국적 기업체는 “한국”이란 경제식민“의 옥토를 매점한 셈이 됐다.

어쨌든, 광주에서 천명 단위의 동족을 학살했다. 죽은 자가 280(?)이라지만, 병신된 자도 “죽은 자”를 부러워할 정도로 “삶”을 “죽음”으로 뒤틀고 있는 것이다.

“법” 없이 죽였으니 죽인 자는 “살인자”다. 국민이 가만 있을 수 없고 세계여론이 잠잠할 수 없다. 그러면 전두환은 무슨 소득을 노리고 그런 살인극을 저질렀을까?

추측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두 가지를 지적할 수는 있을 것 같다.

(1) 이 반체제 궐기 사건을 정적인 김대중과 관련시킴으로 김대중을 사형에 처하자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금출처, 지령 등을 조작하여 “김”을 국가반란죄로 처형하자는 것이겠고,

(2)는 “경상도 정권”(?)을 하나의 “왕조”로 존속시키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그 등용인물의 연고지와 근대화 시설의 경상도 집중 등의 실태를 보아 “억측” 이상임을 드러낸다고 보겠다.

이상하게도 “삼국시대”가 재현한 것 같게 됐다.

나는 그동안 “서독” 순방 중이었다.



[각주]
1. 숙군(肅軍) - 기강이 서 있지 않은 군대나 부정을 저지른 군인들을 엄하게 다스려 바로잡음


[범용기 제3권] (249)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공백 속 회리바람

3월 29, 2026
[범용기 제3권] (249)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공백 속 회리바람

공백 속 회리바람[1]

79. 10. 26. 박정희 암살은 그것 자체가 군사독재의 Period고 “민정”의 회복이라고 속단했었다.

그것은 국내나 해외를 막론하고 대다수 민주인사들의 관측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망적”인 관측이었다.

어쨌든, 국내에서는 김대중, 김영삼 등의 집권 경쟁이 암류[2]했단다. 국민운동이 정권운동으로 변모했다. 무기도, 군대도, 돈도, 지위도 없는 한사람 “야인”이, “권력 맛” 본 60만 군대를 어떻게 Nothing으로 취급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에게 밀려난 대통령의 “서열”로 본다면 윤보선 씨가 제1번이다. 그이도 무시못할 존재다. 그에게는 적어도 돈과 지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에게는 국민이 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강력한 조직안에서의 “국민”이 아닌 한, 그것은 “오합지졸”이다.

그 동안에 비교적 영리하게 정계를 헴치던 김영삼에게 과도정권을 맡기고 김대중은 국민운동에 정진했어야 할 것이 아니었을까?

두 분에게 다 국가재건의 구체적인 청사진은 준비돼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군인” 경력이 없는 김대중에게는 60만 군대 통솔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었다.

군대에는 38선이라는 “단절선”이 그들의 직접 책임 아래 그어져 있다. 그건 “평화선”이 아니라, “휴전선”이다.

“냉전”은 언제든지 “열전”으로 변모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6ㆍ25 동란으로 엄청나게 비대해진 국군은 군인 경험 없는 김대중을 “대원수”로 모시기에 불안을 느낀다.

다시 말해서 언제든지 쉽사리 쿠데타를 반복할 우려가 짙다는 말이다. “장면”이 “장도영”을 구슬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군”은 버릇이 나빠졌다. 거기다가 “미국”을 납득시켜야 한다. 경제파탄을 꿰매려면 “미”와 “일”의 자본을 얻어야 한다.

차관에는 그만큼 “이권”이 제공돼야 한다. 수월한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고언은 이른바 “주마가편”이고 결코 “평가절하”가 아니다.

김대중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심볼이고 자유 한국의 소망이고 그 신념과 양심 때문에 두 세 번 “죽음의 선”을 넘은 “베테랑”이다 그에게는 적어도 “변절”이 없었다.

그의 연설은 민중의 심장에 진실을 인친다. 박정희가 “제 갈 데로 간 다음의 공백기간 중에 그의 서울에서의 연설은 언제나 수만 명의 군중을 열광시켰다.

사실, 여야가 각기 단독 후보로 대결하던 선거전에서 그는 박정희를 훨씬 능가하는 득표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전대미문의 부정투표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은 지금도 그를 자기들이 선출한 대통령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박정희와의 대결은 자신의 기득권 주장에 불과한 것이오 “반란”이 아닌 것이다.

위에서 “청사진” 얘기가 났었지만, 1974년 3월초, 캐나다에 옮겨오기 몇 일 전에 “장공”은 자택감금 중의 그를 방문한 바 있었다. 그는 깊은 종교적 신념을 고백했다.

“하느님이 지금까지 몇 번이고 기적적으로 살려 주셨으니, 장차 무슨 심부름을 시키시려는 경륜이 있으신가 싶어 그 심부름에 충실하려고 밤낮 ‘청사진’을 그려보고 있습니다.

정부 조직부터 말단 동장, 반장에 이르기까지 조직망을 만들어 봅니다. 진짜 민주국가를 세워 보렵니다.

단계적인 남북통일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을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면 그것도 하느님 뜻이고 하느님의 더 높고 깊은 경륜이라 믿고 아무 미련없이 순종하렵니다….”

나는 당신 몸은 민족의 몸이고 나라의 몸이니 부디 자중하라고 격려하고 나왔다. 그 때에 “군경”이 주위와 통로 변두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양일동”이 “민주통일당”인가 하는 정당을 만든 무렵이어서 “김대중” 집의 뜨락은 그 관계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마감 면회였다. 나는 해외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김대중은 반드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불의와 불법으로 “나라”를 찬탈한 전두환은 김대중을 죽여야 자기가 산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자기 권좌(權座) 밑에 깔린 “바늘방석”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사형, 광주학살극을 연출한 것이리라.

지금 세계는 김대중 편이다. 김대중은 이제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살려야 할 의무가 있다.



[각주]
1. 회리바람 – 나선 모양으로 갑자기 빙빙 도는 바람
2. 암류(暗流) -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물의 흐름, 일이나 형편이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고 은근히 변하여 나아가는 기운


[범용기 제3권] (248)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이복규 목사 가다

3월 29, 2026
[범용기 제3권] (248)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이복규 목사 가다

이복규 목사 가다

11월 19일(월) - 한신졸업생 이복규 목사가 위독하다고 한다. 그는 임마누엘 한인연합교회 위임목사다.

간장염경화증으로 10년내 앓으면서도 목회했다. 모오닝싸이드 종합병원에 갔다. 완전 혼수상태였다.

79년 11월 21일(수) - 이복규 목사 세상 떠났다.

11월 23일(금) - 김익선 목사와 함께 이복규 목사 “빈소”에 갔다. 그 교회로서의 영결예배에 참석했다.

11월 24일(토) - 이복규 목사 장례식날이다. 9PM에 인철ㆍ혜원과 함께 Leaside United Church에 갔다. 거기서 노회로서의 이복규 목사 장례식이 거행된다기에 동참한 것이다.

그가 목회하던 백인교회원들이 진심으로 섭섭해 한다. 아이언부릿지교회원들, 로템암교회원들, 그리고 불루어스트릿한인연합교회원들과 본교회인 임마누엘교회원들로 조객이 초만원이었다.

장례식에서 노회를 대표하는 백인 목사가 영어로 설교했고 내가 나대로 한국말 설교를 했다.

이복규 목사는 백인교인들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선한 목자”였음에 틀림없겠다.

스카보르 장지에까지 가서 하관식에도 참석했다.

부인에게는 “강하고 담대하게 살라”고 격려했다.



[범용기 제3권] (247)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토론토에

3월 29, 2026
[범용기 제3권] (247)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토론토에

토론토에

79년 11월 8일(수) - 최우길 집을 떠나 라과디아에서 11시 30분발, 12시 30분에 토론토에 내렸다. 이 목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이 목사 집에 왔다.

밤에 경용이 와서 “할머니”와 나를 자기 집에 모셔간다.

최인호 기자가 쓴 “맨발의 세계일주”를 읽었다. 어딘지 사람을 깔보는 신문기자다운 기행문이다. 눈치 안 보는 솔직한 패기가 풍겨있다.



[범용기 제3권] (246)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N.Y.에

3월 29, 2026
[범용기 제3권] (246)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N.Y.에

N.Y.에

1979년 11월 3일인가 상철과 나는 N.Y.로 갔다. UM 주최 대(大) 시국강연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UM 사무국장 김정순 동지가 만반 준비를 진행시킨 것이었다.

11월 4일(일) - 만하탄 교회에서 예배하고 오후 5시부터는 UM 주최 대시국강연회가 Flushing 소학교 강당에서 모였다.

연사는 함석헌, 김상돈, 나, 그리고 김중태였다.

함석헌은 여기서도 “쾌이커”의 내적광명(Inner Light) 을 설명하고 있었다. 두 시간 이상 얘기한다. 늙은이가 원고도 없이 강연이라고 하노라니 얘기가 쳇바퀴를 돈다.

다음이 내 차례인데 내게 배당된 시간은 다 지나간지 오래다.

슬그머니 부화가 난다. 나는 민중민주주의를 내용으로 준비했는데 아주 요약해서 10분 동안에 마쳤다.

“인테리”가 민중 속에 들어가 “인테리민중”이 되고, 민중이 인테리와 한몸되어 “민중인테리”가 되야 한다. 학생층도 “인테리”다. 인테리의 첨단일지 모른다. 그런데 학생운동에 자신들을 국한시키려는 것 같다.

“우리는 기성세대를 불신한다…”는 4ㆍ19전통을 자랑한다. 노동자 계층과도 제휴하려 하지 않는다.

“일반시민은 가겠거든 가라, 우리는 학생기(旗)를 지킨다.” 6ㆍ3 사태 때도 그러했다. 그때 함석헌과 나는 투석전에서 “상이학생”으로 입원한 서울대학 학생들을 방문했었는데 냉담한 표정이었다.

문간에 집결해 대기하는 학생부대를 찾아 “우리 늙은 세대가 일을 잘못해서 학생들에게 누(累)를 끼치게 됐으니 미안하오. 잘들 해주시오!” 해도 학생들은 무표정, 무인사였다.

감옥에 갇혀있는 학생들을 방문했을 때에는 제법 인사성있게 대했다.

“우리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기쁩니다. 우리 걱정은 마시고 계속 민주운동을 지도해 주십시오. 저희도 나가면 또 하겠습니다….”

함석헌과 나는 학생들 돌팔매에 맞아 머리, 가슴 다리 등에 상처를 입고 입원 중인 경관들을 방문했다. 그들을 방문하는 시민들은 모르긴하지만 없는 것 같았다. 직계가족이 간호하고 있었다.

“얼마나 괴로우시오. 참으로 안됐습니다…” 하고 문병한다.

“감사합니다. 저흰들 학생들 심정을 몰라서 그러겠습니까? 어찌못해 그러는 것입지요! 용서하십시오!” 한다.

그는 치안국경감인가 되는 꽤 높은 직위의 사람이라 했다.

며칠 안되어 서울대 법과대학 학생들과 극소수의 고대생들이 놓여 나왔다. 학생회 주최로 석방 축하 Party가 종로회관에선가 열렸다. 노장측으로서는 함석헌, 이병린, 나, 장준하, 지학순, 계훈제, 송원영 등등이 초대됐던 것 같다.

석방환영 Party는 인상적이었다. 감옥안에서의 생활상 같은 것도 아주 신사적으로 보고된다. 석방될 때의 서약을 지킨다는 심사에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정수일”이 사회했다.

기독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앙양심에서 우러난 “고백”에 따라 주체적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그들의 본영(本營)은 교회다. 그 무렵만해도 경찰에서 교회 내부에까지 손대지는 못했기에 기독학생들의 전략, 또는 작전참모상 교회당은 유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학생들도 급하면 교회당에 몰려들었다. 신앙에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방공호”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모두 총력전이 아니면 개별격파의 위험선상에 서 있는 것이다. 학생 운동의 민중화는 반드시 이루워져야 한다.

“총력전”을 벌여야 한다.

이건 69년 때 얘기니까 1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지금에도 돋보이게 달라진 데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79년 11월 4일 N.Y.에서 열린, “박정희 제거 이후”의 첫 강연회에서 나는 “인테리의 민중화”를 다시 강조한 것이었다.

어쨌든, 강연회는 성공적이라고 UM사무국 관계자들은 자랑스레 말하고 있었다.

11월 5일(일) - 2PM에 교회본부에서 7인위원회원과 다른 동지들이 합석하여 광범위한 “뉴스”와 토의사항을 검토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마치고서 나는 악수 작별 – 최우길 장로 집에 갔다.

11월 5일(월) - 5PM에 N.Y. 지구 한신동창들이 최우길 집에 모였다. N.Y. 지구 한신동창회가 결성되고 신성국 목사가 회장으로 수고하게 됐다.

총무는 김영호 목사다. 첫 사업으로 장공기념도서관에 신간 서적들을 사 보내기로 했다. 장학금도 보낸단다.

11월 7일(수) - 최우길 집에서 혼자 쉬었다.

7PM에 김홍준 부부, 임순만 부부, 김정순 부부가 나를 중심으로 한식점에서 만찬을 나누면서 “뉴스”와 의견교환을 했다.

금후의 본국정세가 어떻게 변천되든간에 “박”의 총살은 우리에게 울분발산의 기회가 된다.



[범용기 제3권] (245)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박정희 총살 직후

3월 29, 2026
[범용기 제3권] (245)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박정희 총살 직후

박정희 총살 직후

1979년 10월 26일에 KCIA 부장이고 박정희와 고향을 같이한 김재규 씨는 박정희를 총살했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총살한 것이 1909년 10월 26일이어서 같은 날짜다. 햇수로 말한다면 환갑년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을 죽였지만, 다음 해에 한국은 일본에 합병됐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한국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김재규가 독재자 박정희를 총살했지만 군사독재는 당분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김재규는 한국민주역사에 영원한 등대로 빛날 것이다.

우리는 시국의 급변에 대처하기 위하여 단기와 장기 양편으로 전략을 재고려하고 전선을 재정비해야 하게 됐다. 당장 자유한국의 실현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선 발단은 된셈이고 출구는 생긴 것으로 생각됐다.

그래서 이 목사는 N.Y. 동지들을 긴급 방문하려는 것이었다.

10월 30일(화) - 나는 종일 자리에 누워지냈다. 박정희 암살사건에 관한 T.V. 기자와 이 목사 대담이 T.V.로 방영된다.

10월 31일(수) - 이 목사는 밤 비행기로 N.Y.에 갔다. 수일 후에 돌아온 이 목사는 아직 이렇다 할 구체안이 없었다고 보고한다.

79년 10월 30일(화) - 박정희 암살내막이 T.V.나 신문에서 자주 다뤄진다. 그러나 아직도 “암중모색”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범용기 제3권] (244)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부산 항쟁과 박정희 총살

3월 29, 2026
[범용기 제3권] (244)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부산 항쟁과 박정희 총살

부산 항쟁과 박정희 총살

1979년 10월 17일(수) - 부산서 반정항쟁이 일어나 파출소, 신문사 등이 전소됐단다. 부상자 9백명, 죽은 자 5명이란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악정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분출한 화산 분화구라는데 중대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하겠다. 정부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한다.

79년 10월 22일(월) - N.Y.에서는 청년중심으로 “대데모”를 계획 중이란다. 나의 동참을 요망해 왔다.

부산서 터진 데모는 마른 풀밭에 불붙듯 전국에 퍼져 서울에 밀려오르고 있다 한다. “민주”의 격랑이다. 좌익폭동이 아님은 물론이다.

해외민주단체들로부터 전화가 쉴새없이 올려온다.

전국에서 “데모”대가 달려들어 서울을 “수몰지대”같이 데모인의 “홍수” 바닥에 잠그면 박정희의 “헬리콥터”도 물고기 신세가 될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박정희와 이후락과 박종규가 KCIA 어느 비밀실에 모여 대책을 토의하고 있었다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반정부 민중 2백만(?)을 단번에 학살함으로써 정권안보를 유지했다니 우리도 탱크, 기관총, 대포 등을 총동원하여 2백만명쯤 단번에 학살해서 버릇을 가르쳐야 하겠다고 박정희가 뇌까리자 이후락, 박종규가 동의했다는 것이다.

경호 책임자인 KCIA 부장 “김재규”는 2백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악당괴수 두 세 사람 처치해 버리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세 두목을 쏴 버렸다. 박정희는 머리에 세 군데나 명중되어 참사했고 다른 둘도 즉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재규는 “민주주의 만세”를 불렀다.

자기도 그 자리에서 자살하려 했었으나 체포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내력과 경과는 역사가 바로 쓰여지는 후일을 기대할 밖에 없겠다.



[범용기 제3권] (243)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함성국 박사 특별집회(토론토 연합교회에서)

3월 29, 2026
[범용기 제3권] (243)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함성국 박사 특별집회(토론토 연합교회에서)

함성국 박사 특별집회

토론토 연합교회에서

9. 28. (금) - 연합교회에서 오늘부터 특별집회를 연다. 강사는 Boston의 함성국 박사다.

그는 연대교수로 있다가 도미하여 지금 Boston에서 백인교회 목사로 시무하는 구약전공자다.

9월 29(토) - 밤에 함성국 박사 강연회에 참석했다. 연제는 “예언자의 종교와 오늘의 현실”이다.

9월 30일(일) - 연합교회 예배에서 함성국 박사의 “고난의 종과 역사”란 설교를 들었다. 통찰력이 빛나는 설교였다.

5PM에 Korea House에서 함성국 박사 환영 Dinner 모임이 있어서 나도 참석했다. 함 박사는 이 목사 집에 와서 밤 2시까지 환담하다가 유숙했다.

10월 1일(월) - 함성국 박사와 나, 신자가 이 목사 차로 교회에 단풍구경을 나갔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식욕”을 잃은 나는 식욕과 아울러 “의욕”도 상실한 것 같다. 줄곳 “병자” 기분이다.

짐에 돌아와 처가 끓여주는 죽을 한공기 먹고 누웠다.


[범용기 제3권] (242)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함석헌 만나고

3월 29, 2026
[범용기 제3권] (242)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함석헌 만나고

함석헌 만나고

9월 14일(금) - 태풍 계절이라, 여기에도 여파가 밀려퍼진다. 구름이 너무 짙어서 대낮인데도 황혼 같다.

한국에서 함석헌 씨가 온다고 해서 이 목사와 나는 오후 5시에 공항에 나갔다.

영국 London에서 토론토로 날은 함석헌은 피곤한 기색이 없다. 칼강칼강하고 걸음도 가볍다.

토론토 쾌이커그룹 책임자라는 어느 노파 집에 유숙한다.

김정근과 나도 그 집에 들러 식사를 같이 했다. 김정근 차로 Weston에 왔다.

9월 16일(일) - 연합교회에서 함석헌 옹이 설교했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란 제목이다. 내가 축도했다.

예배후 교육회관에 갔다. 토론토 민건 주최 함석헌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장장 두 시간 반의 긴 강연이지만 시국담은 없었고 쾌커 평화주의 해설에서 맴도는 내용이었다.

함석헌은 독설로 유명했는데 “사자후”(獅子吼)[1]를 기대하고 왔던 청중은 양떼의 잦아붙는 애원을 듣고 간다고 불평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언가 숨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필하고 함옹을 노벨평화상 수상 후보로 추천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9. 18(화) - 토론토 민건 주최 함석헌과의 좌담회에 나도 참석했다.

간단한 환영 Party가 있었다.

9월 20일(수) - 코레아 하우스 위층 Apt.에 사는 함 선생 손녀댁에서 함 선생을 점심식사에 모시면서 나와 이 목사도 함께 초청한다.

배석하여 대접을 받았다.

오후에는 이 목사가 자기 집에 함 선생을 초대했다.

밤 열시까지 얘기했다.

9월 26일(수) - 함석헌 옹이 9시에 N.Y.로 간다. 이 목사와 나는 공항에 나가 전송했다.

그 동안 함옹에게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공항에 같이 나온 그 젊은이 주위에는 영사관 직원 한두 명이 둘러서서 허물없는 친구인양 호들갑스럽게 그와 담소하고 있었다.



[각주]
1. 사자후(獅子吼) - 사자처럼 우렁차게 부르짖으며 열변을 토하는 말


한국기독교연합회 제12회 총회 총대제위께 고함

한국기독교연합회 제12회 총회 총대제위께 고함 이 문서는 한국기독교연합회(N.C.C) 제12회 총회 당시 기독교장로회(기장) 대표들이 총대들에게 전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담고 있다. 기장 측은 예수교장로회(예장)와의 분열 이후 회원권 행사 과정에서 겪은...